감정의 발효 보고서

유자의 법칙

by 심연천문대

우연히 유자를 받을 기회가 생겼다.

여행을 가는 친구가 시켰던 유자가 여행 전날 도착해 처치곤란한 유자였다.

유자청 만드는 법을 검색해 보았다.

10분이면 만들 수 있다는 제목만 읽고 호기롭게 유자를 받았다.

집에 도착해 유자청 만드는 법을 제대로 찾아보았다.

10분 만에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맛있게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갔다.


유자는 씨가 많은 과일이었다.

씨가 들어가면 청이 써진다 해서 하나하나 조심스레 씨를 제거했다.

유자 껍질에 하얀 귤락 같은 속껍질이 들어가면 또 쓰다 해서 껍질을 하나하나 칼로 도려냈다.


유자를 손질하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인간관계나 사랑도 유자청 만드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다고.

유자 씨를 하나하나 빼내는 건 마음의 쓴맛을 덜어내려는 일이고,

껍질 속의 흰 부분을 도려내는 건 서로의 오해와 상처를 다듬어가는 과정이었다.

달콤한 사랑을 만들려면 손끝이 베일 수 있다는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인스턴트 유자청처럼 쉽게 만들 수 있는 감정은 금방 상한다.

정성 들인 유자청은 처음엔 손이 베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깊은 맛이 난다.

사랑도 시행착오를 감내해야 비로소 농익는다.


달콤한 유자청을 만들려면 이렇게나 손이 많이 가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 걸 진작에 알았다면 흔쾌히 유자를 받았을까?

이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다.

사랑이란 게 이렇게 노력을 해야 하는 걸 알았다면 이 사랑을 시작했을까?

누군가는 10분짜리 인스턴트 사랑에도 만족하지만,

나는 쓴맛 없는 사랑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


여행 전날 급히 배달된 유자는 마치 우리 인생에 갑자기 들어온 관계 같았다.

귀찮다고 미루면 어느새 물러지고, 정성껏 손질해 청으로 담가두면 오래도록 향이 남는다.

내 사랑도 언제나 예정 없이 찾아와 당장 다듬지 않으면 썩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때 바로 표현하지 않은 마음과 다듬지 못한 관계의 균열은 결국 썩게 될 뿐이었다.


마음을 다듬듯 유자를 다듬는다.

레시피에 없던 꿀도 내 마음대로 넣었다.

모든 레시피엔 순서가 있지만 정답은 없다.

다만, 정답은 없어도 취향은 남는다.

맛은 각자의 손끝에 달려 있고 사랑도 그렇다.

손이 많이 가지만, 내 손끝에 녹인 취향이 사랑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사랑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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