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흐린 거울의 계절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머문 시간

by 구시안

나는 나를 잃어버린 적이 없다.
단지 너무 많은 나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어느 날,
길을 걷다 문득 멈춰 서면
내 안의 누군가가
내가 아닌 방식으로 숨을 쉰다.

그는 나보다 더 조용하고
나는 그보다 더 불안하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같은 몸을 나눠 쓰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미 너무 많은 내가
나를 대신해 살아가고 있으므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단 하나의 나였고

다시 찾았다고 믿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나를 모른다.


불 앞에 선 아이처럼, 그 불에 도취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호하게 웃음 짓기도 하고,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상태로. 눈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 앞에서 이미 경험했던 모든 것은 내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계절마다 벗어놓은 허물을 스스로 치우며, 두 육체를 비추는 태양 아래 그리고 달빛 아래서 나의 소박한 방 안에 거울들은 늘 그렇게 흐려지고 세상의 다른 거울만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수많은 길이 나 있지만,

이 대지 위에서

지평선 없는 이 밤하늘 아래서

나는 수많은 이유로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날도

어제는 몰랐던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잊지 못할

아름다운 이유들만 갖고 있지는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내가 가진 시선의 열쇠가 빛이 나진 않지만,

이 풍경 앞에서는 진실을 열길 바라는 마음으로

솔직하게 마음을 보살피며

스스로를 토닥이는 밤도 많았다.


정당한 이유로

내가 스스로 불을 켜고 앉아 있는 것에 의심하지 않으려 불 속에 던져진 나뭇가지처럼 나를 조금씩 태워가도 좋은 밤이 익숙해진 것이다. 모든 것의 끝자락에 서 있는 태양을 바라보며, 그 아래 풍경 앞에 나를 세운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씨앗에도

초록빛을 가진 이파리가 태어나고

행복을 사냥하는 사냥꾼들이

잠복을 시작할 때

소리 없이 움직이는

투명한 사냥감이 늘어가는 것을 보는 건

황홀이 아닌 도취가 되기도 하는 밤.


회전할 때마다

물컹거리는 시곗바늘을 바라보며

오늘을 불안해하다가도

이 밤에 엮인 광선에

내가 할 수 있는 열 손가락을 움직이며

매듭을 짓고

다시 풀고를 반복하며

어쩌면

밤이 아닌

태양이 온종일 펼쳐 놓고 있는 것처럼

매일 낮인 밤도 길었다.


스쳐 지나가는 행인이 되길 바란다.

황송해하는 사랑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대로 누워 있는

침대며

벗겨놓은 옷이며

내가 가진 두 팔과 열 손가락이

화살 같은 쾌락을 위해

쏘아지고 있는 밤에

나의 살들은 유배되지 않고

하나의 몸이 시작되는 곳에 앉아

나의 형체와 의식을 지니고

소멸될지라도

스스로 밝힌 불을 응시한다.


착란적인 공간의 빛이 물들면, 눈은 살아가게 하고, 저 멀리로 납처럼 무거운 몸이 흘러가고, 입술은 배를 움직이고 혀의 힘은 주지 않으며, 자신의 힘을 알지 못해 괴로워하는 농부처럼, 자신의 이삭을 줍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될 뿐이다. 손바닥 안에서 나의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 언저리까지 그 이삭은 살갗을 뒤덮고

어떤 색으로 태어날지를 망설인다.


눈 사이에 드리운 밤으로부터

나의 등 뒤에 자리하고 있는 낮으로부터

한순간에 불타오르는 동일한 밤의 향연은 어김없고, 폭풍우를 일으키고 허리를 접혀 엉뚱한 모양을 하고 있는

가늘게 누워있는 달 주변에 자리한 무리들이 다이아몬드의 물결처럼 흘러갈 때, 일치된 혀와 무지한 손은 뒤늦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속삭인다.


누구의 삶도 가늠하는 것이 아닌

누구의 삶을 규정짓는 것이 아닌

나의 삶을 가늠하는 자는 그렇게 드리워

치수를 재고

올바르게 움직이기 위해

내 뒤 편에 자리한 쌍둥이처럼 서 있는

그림자에게 가르친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고.

손은 밤을 찾고 별 위로 열리고

눈은 태양을 가리키는

반대방향의 성향을 가진

쌍둥이처럼.


씻긴 물과

타는 불 사이에 서 있는

새벽과 석양을 혼합한

깊은 고요를 원하는 일에 집중하는

그 고요를 위해

태어난 듯

서로가 다르게 보이지만

그 깊이를 알고 있기에

간격을 두고 사는

나라는 존재는

결코 똑같지 않은

또 다른 그림자를 갖고 살고 있다.


스스로 지우고

스스로 변화하는

서늘한 계절과

뜨거운 계절에

시간의 차원에

빛깔의 차원에

강함과 약함이라는 존재로 남아

어쩌면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사는

사람으로 진화하지 못한 존재처럼.

내 젊음은 이미

열정적으로 동사변형이 되어 자리하고 있고

피는 봄을 되풀이해

무엇인가를 부르지만

들리지 않는 새벽은

이미

모든 나이에 찾아왔다.


용기로 빛나는 문은

밤에만 열리고

모든 나이에 열려 있는

열매는

여전히 비릿하고

향기롭지 못하여

그 흔한 사랑의 대화처럼

달콤할 수 없기에

나의 심장은

지금의 나이에도

단 하나의 입술만을

갖고 있다.





Perdue et retrouvée


이 곡이 들어 있는 앨범을 좋아합니다.

글보다는

가끔은

음악이 더 선명한 글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유일하게

가장 솔직해 지는

밤의 시간.

아무도 몰라도

알지 못해도 상관없는

솔직한 감정을 담아 봅니다.


깊은 밤이 오면 틀어놓는

앨범 수록된 곡중 한 곡 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밤을 보내고 있다면

선율에

솔직한 감정을 맡겨도 좋은 곡들입니다.


검고 흰 것.

건반이라는 이름을

소리없이 눌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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