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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떠난 뒤에야 이름을 얻는 감정들

by 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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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토요일 쉰다는 것에 행복을 느끼지는 않았다.

회사의 스케줄이란 변화무쌍한 것이기에 그동안의 빨간 날의 지옥에서 고생했다는 보상쯤으로 여기기로 했다.



혼자 사는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집을 잘 꾸미고 사는 일이다.

산책이나 책방을 빼고는 밖을 나갈 일이 거의 없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집이다. 내가 머무는 공간.

하얀 정신병원처럼 꾸미고 사는 나에게 필요한 것들은 늘 존재한다. 경기도에 자리한 이케아를 가기로 했다.



얼마 전 어머니를 보내고 난 후 시름에 빠져 있는 친구를 불렀다.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나는 이미 부모님을 모두 보내드려 보았기에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친구 녀석 역시 비혼주의자가 된 것은 나와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살아온 환경은 비슷했다.



가끔 나는 왜 어르신들은 이렇게 추운 날에 떠나실까를 생각해 본다.

어쩌면 하얀 눈을 계단 삼아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너무 멀기에 일찍 길을 나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 내겐 증오했던 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아버지를 보내면서 흘리는 눈물 속에 알았다. 나는 아버지를 정말 사랑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증오하든 혐오하든 미워하든 누군가가 사라져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사랑을 했기 때문에 아프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사랑의 감정이다.



이케아로 가는 길은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낸 녀석들의 담담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친구: " 생각보다 힘드네...."

나: " 그게 그럼 당연히 힘들지 쉽냐...."

친구: " 넌 어땠니? "

나: " 힘들었지...."

친구: " 난 왜 이렇게 죄책감이 들까? "

나: " 후회되는 게 많은 가 부지..."

친구: " 그러네...."


좋아하는 잔잔한 팝송이 차 안에 퍼졌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떠난 뒤에야 이름을 얻는 감정들이 있다. 그 첫 번째는 아마도 사랑이라는 감정일 것이다.

아프기 싫어서 사랑을 안 하고 싶다? 그건 아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아파지는 것이었다. 차라리 이게 싫다면 사랑을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 말이 틀린 말도 아니지만, 사랑하니까 아파지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그 짙어지는 힘듦이 싫어서 새로 사랑을 시작하지 않기로 했다가 정확한 표현 같다.



나는 이미 혼자가 아주 익숙해져 버렸다.

같은 방향을 보고 살아가고 있는 친구 녀석도 마찬가지다. 몇 번의 연애 몇 번의 사랑. 정말 사랑했는지 알고 싶다면 그 상대가 사라져 봐야 알 수 있다. 쉽게 잊히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 쉽게 잊히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사라졌을 때 정확히 보이는 것들이 있다.

존재할 때는 흐릿했고, 함께 있을 때는 배경처럼 밀려났던 것들. 말해지지 않았던 기대, 확인되지 않았던 애정, 당연하다는 이름으로 방치되었던 마음들. 사람은 떠난 뒤에야 풍경이 되고, 그 풍경 속에서 비로소 무엇이 있었는지가 또렷해진다. 부재는 공백이 아니라 확대다. 없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없기 때문에 정확해진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은 이 정확함 앞에서 오래 서성인다.

그들은 이별을 사건으로 겪지 않는다. 이별은 그들에게 하나의 상태다. 숨처럼 지속되고, 생각처럼 반복된다. 사라진 사람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지만, 남은 사람의 하루는 끊임없이 설명을 요구받는다. 왜 아직도 아픈지, 왜 지나가지 않는지, 왜 정리하지 못하는지. 그러나 사랑은 정리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사라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함께 있을 때는 오해였던 것들이, 떠난 뒤에는 성질을 드러낸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내가 얼마나 자주 스스로를 접었는지,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참았는지. 사랑은 늘 현재형일 때보다 과거형이 되었을 때 더 정직해진다. 감정은 지나간 뒤에야 자기 이름을 얻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은 흔히 약하다고 오해받는다.

하지만 그들의 아픔은 미련이 아니라 충실함에 가깝다. 충분히 느꼈고, 충분히 믿었고, 충분히 자기 자신을 내주었기 때문에 생기는 통증. 그 아픔은 사랑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사랑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흔적이다.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사라진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지만, 남은 사람의 세계는 더 많은 말을 시작한다.

거리의 불빛, 우연히 들린 문장, 이전에는 의미 없던 날짜들. 모든 것이 기호가 된다. 이것은 집착이 아니라 감각의 과잉이다. 랭보가 말한 것처럼, 감각이 너무 많이 열려버린 상태. 세계는 그대로인데, 받아들이는 쪽이 변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부조리한 상황이다. 사랑은 분명히 존재했는데, 그것을 증명해 줄 대상은 사라졌다.

이유는 남지 않았고, 결과만 남았다. 그래서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고통은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이 질문은 곧 다른 질문으로 바뀐다. 의미가 없어도, 나는 이것을 느낄 권리가 있는가. 그들은 끝내 이 질문을 혼자서 통과한다.



사라졌을 때 정확히 보이는 것은, 상대만이 아니다. 그 순간, 자신이 보인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어디까지 감내했는지, 어떤 선을 넘지 않으려 애썼는지. 이별은 상대를 잃는 사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시 마주하는 계기다. 그래서 아픔은 오래간다. 그것은 상실의 아픔이면서 동시에 자각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은 빠르게 회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통을 줄이기보다 통과한다. 잊으려 하지 않고, 덮으려 하지 않으며,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다만 그 아픔을 자신의 일부로 두고 살아간다. 그것은 낭만도, 자기 연민도 아니다. 사랑을 실제로 겪은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태도다.



사라짐은 끝이 아니라, 관계의 성질을 바꾼다.

함께 있을 때는 나누지 못했던 진실들이, 떠난 뒤에는 마음속에서 명확해진다. 그래서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완성된다. 함께 있을 때는 불완전했고, 부재 속에서야 전체가 보인다. 이것은 잔인하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역설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덜 아프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괜찮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랑은 흉터처럼 남는다. 아프지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는 흔적. 그리고 그 흔적 덕분에, 그들은 다음 사랑에서 조금 더 조심스럽고, 조금 더 정직해진다. 사랑을 가볍게 다루지 않게 된다.



사라졌을 때 정확히 보이는 것들은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뒤늦은 증언이다. 그 증언을 끝까지 견디는 사람들,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은 이미 한 번, 깊게 살아본 사람들이다.



쿠키 대화.


나: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죄가 아니야 성현아. 사랑도 해봤고. 미워도 해봤고. 그리워도 해봤고. 지금 네가 마음속에 느끼는 상실감은 솔직한 거니까. 마음껏 즐겨라. 그리고 너희 생각을 잘 접어 어머니께 넣어드려.


친구: 하긴... 생각만으로 뭐든 하는데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이렇게 생각만으로도 죄책감이 드는지...


나: 그렇지 않아도 돼! 마음껏 죽이고, 마음껏 미워하며 살아. 생각을 생각으로 둘 수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 때 마음껏 해. 너 마음하나라도 편하게. 어깨 피고. 밥이나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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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56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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