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와 출발선이 다른 언어들이 같은 문장 위에 설 수 있는가에 대하여
공평은 같은 몫이 아니다. 같은 높이에서 시작하는 일도 아니다.
공평은 누가 어디에서 넘어졌는지를 끝까지 기억하는 태도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숨이 가쁘고, 어떤 사람은 넘어져도 바닥이 부드럽다.
세상은 그 차이를 운이라고 부른다.
공평은 숫자로 오지 않는다. 저울 위에서 흔들리며 언제나 불편한 질문으로 남는다. 왜 저 사람은 더 견뎌야 했는가. 왜 어떤 고통은 설명조차 필요 없는가. 공평을 말하는 입이 가장 먼저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모두에게 같다고 말하기 전에 누구에게 가장 가혹했는지 한 번 더 내려다보아야 한다.
공평은 모두를 만족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진짜 공평은 언제나 욕을 먹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욕을 감당해야 한다. 공평은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쳐 쓰는 문장이다. 하지만 공평이라는 단어는 늘 불편하다.
늙은 나이는 숫자가 아니다.
피가 천천히 식는 방식이다. 열망이 아직 살아 있는데 세상이 먼저 등을 돌린 상태다. 나는 젊음을 통과했다.
불타는 실패와 목이 쉬도록 외친 확신들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밤들을 삼켜가며.
늙은 나이는 지혜가 아니다.
지혜라는 말은 너무 깨끗하다. 이건 너무 많이 봐버린 눈. 너무 많이 견뎌버린 신경. 더 이상 속지 않겠다는 이를 악문 근육이다.
나는 아직 분노한다.
다만 예전처럼 소리치지 않는다. 분노는 이제 혈관 속에서 검게 순환하며 나를 조용히 단단하게 만든다.
늙은 나이는 패배가 아니다.
그건 살아남은 자의 자세. 모든 희망이 거짓일 수 있다는 걸 알고도 오늘을 버리는 대신 몸 안에 숨겨두는 기술. 나는 늙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쓴다. 아직도 불편하다. 아직도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았다.
늙었다는 말에는 언제나 시간보다 마음이 먼저 묻어 있다.
주름이나 숫자보다 앞서 도착하는 것은 피로다. 반복된 실망, 연기된 약속, 끝내 오지 않은 기대들. 몸은 아직 여기 있는데, 마음이 먼저 몇 해를 건너가 버렸을 때 사람은 그렇게 말한다. 나는 늙었어라고. 그 말은 사실 나이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더 이상 서두르고 싶지 않다는 고백에 가깝다.
정말로 늙은 사람은 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질문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쓰지 않는다. 세계와의 마찰을 최소화한 채, 더 이상 자신의 상태를 해석하지 않으려 한다. 늙음은 침묵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아직 “늙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실은 여전히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언어로 꺼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아직 삶의 내부에 있다.
우리는 흔히 늙음을 소진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어떤 늙음은 고갈이 아니라 축적이다. 너무 많이 겪어서 가벼운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상태. 쉽게 흥분하지 않고, 함부로 결론 내리지 않게 된 상태. 말수가 줄어든 것은 비어 있어서가 아니라, 이미 안에 너무 많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정이 정제된 밀도로 바뀐 것이다.
이 시점에서 삶은 다른 속도를 요구한다.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많이가 아니라, 덜 흔들리게, 덜 소모되게. 늙어간다는 것은 욕망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욕망의 방향이 바뀌는 일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기 안쪽으로, 증명에서 체감으로, 결과에서 과정으로. 그래서 문장은 느려지고, 생각은 길어지며,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만 남는다.
늙음이 평화로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포기해서가 아니다.
선별했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를 유지하지 않기로, 모든 감정에 반응하지 않기로, 모든 기대를 감당하지 않기로 선택한 결과다. 이 선택은 냉소가 아니라 자기 보호의 기술이다. 늙음은 삶을 포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삶을 오래 쓰기 위한 방식이 된다.
그래서 “나는 늙었어”라는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나는 이제 쉽게 속지 않아.”
사람에게도, 말에게도, 상황에게도. 이것은 비관이 아니라 분별이다. 더 이상 과장된 희망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확인되지 않은 약속에 마음을 저당 잡히지 않는 상태. 상처를 피하려는 도피가 아니라, 상처를 감당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거리감이다.
작가에게 이 시기는 특별하다.
젊음의 언어가 날카로웠다면, 지금의 언어는 무겁다. 빠른 문장 대신 오래 남는 문장, 강한 주장 대신 정확한 침묵. 이 늦게 오는 힘은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한 번 닿으면 오래 머문다. 늙음은 창작의 끝이 아니라, 비로소 불필요한 것을 걷어낸 이후의 시작일 수 있다.
그러니 늙음을 서둘러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상태는 패배가 아니라, 도착이다. 많이 살아왔다는 증거, 너무 많은 것을 지나왔기에 이제는 함부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무게. 그 무게가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질지라도, 그 안에는 이전에는 없던 평온이 있다.
늙어간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일이다.
나는 아직 쓰고 있고, 느끼고 있고, 나를 언어로 남길 수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아직 충분히 살아 있다. 최소한 문학에서 만큼은 늙은 것은 죄가 아니다. 숫자를 떠나 누구에게든 문학에서 만큼은 공평해야 한다. 문학은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을 부추긴다. 경쟁을 부추긴다. 인종차별처럼 느껴진다.
'공평'이 없는 문학판이라는 대전에 참여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언어의 총을 들것이다. 입에는 칼을 물것이다. 문학은 젊은 사람만 입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세상에는 이미 '참전용사'라는 이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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