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아래, 멈추지 않는 숨
모든 것이 잠시 멈춘 순간,
고요는 무겁지 않고
세상에는 겨울을 서서히 녹이는 봄비가 내린다.
잠시 부슬거리는 봄비를 바라본다.
나는 그 안에서 자유롭게 숨을 쉬고
멀리서 내 목소리가
내 안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낀다.
거울 속의 나는 말한다.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고.
이제 그만하라고.
적당히 하라고.
거기까지가 좋겠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듯 모른 척한다.
은빛 표면에 비친 얼굴에는
흔들림이 없다.
밀랍인형 같은 한 가지 표정이 자리하고
이미 너의 심장에는 불이 지펴졌다고 말해 준다.
이제 녹아내릴 준비나 해두라고.
나는 은빛 표면의 고요 속에서
잠시, 아주 잠시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 숨이 봄비와 함께 흘러가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이 되어 간다.
멈추라고.
멈춰야 한다고.
다른 세상에 사는 나는
멈출 때라고
계속되는 메아리를 만들고 있었다.
듣기 싫게.
세상은 늘 멈추라고 말한다.
조용히 하라고, 넘치지 말라고, 너무 오래 바라보지 말라고.
너무 깊이 생각하면 피곤해진다고, 너무 오래 사랑하면 다친다고, 너무 오래 걷다 보면 길을 잃는다고.
나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멈추라는 말은 언제나 나를 더 움직이게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공기는 이미 결정을 내려놓은 듯하다. 오늘은 이 정도만 숨 쉬라고, 이 정도만 기대하라고, 이 정도만 실망하라고.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조차도 절제된 표정이다. 빛은 벽 위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그림자 역시 제 자리를 안다. 모든 것이 적당하다. 적당하다는 말은, 어쩌면 가장 잔인한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커피를 마신다. 쓰다.
쓴맛은 솔직하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설탕을 넣지 않으면 더 이상해진다. 세상은 늘 설탕을 조금씩 권한다. 괜찮아질 거라고, 조금만 달게 만들면 괜찮다고. 그러나 나는 오늘도 설탕을 넣지 않는다. 혀가 찡그려지고, 그 찡그림 속에서 나는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거리로 나가면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도 도착하지 않는다. 그들의 걸음은 분주하지만 표정은 정지 화면 같다. 정지된 얼굴로 이동하는 사람들. 움직이지만 멈춰 있는 존재들.
나는 그들 사이를 지난다. 나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내 안쪽에서는 무엇인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린다.
멈추지 말라고.
세상은 효율을 말한다. 감정도 효율적으로, 슬픔도 적당히, 기쁨도 타이밍에 맞게. 울음은 회의가 끝난 뒤에, 사랑은 형편이 나아진 다음에, 분노는 정제된 언어로.
나는 가끔 생각한다. 정제되지 않은 것은 왜 늘 부끄러움이 되는가. 흘러넘치는 것은 왜 늘 실패가 되는가.
밤이 오면 사물들은 제 목소리를 조금 되찾는다. 낮 동안 참고 있던 소리들이 어둠 속에서 느슨해진다. 냉장고의 진동, 바닥의 미세한 삐걱임, 멀리서 지나가는 차의 숨결. 그 소리들은 나에게 속삭인다. 우리도 낮에는 멈춰 있었어, 하지만 완전히 멈춘 건 아니야. 속에서 계속 떨고 있었지.
나는 그 말을 믿고 싶다.
멈춘 것처럼 보여도, 실은 속에서 계속 흔들리고 있다는 것.
고요해 보이는 사람도 사실은 내부에서 폭풍을 키우고 있다는 것.
어느 날은 정말로 멈추고 싶어진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고, 아무 기대도 품지 않고. 그냥 벽처럼, 의자처럼, 이름 없는 물건처럼 존재하고 싶다.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그러나 나는 물건이 아니다. 나는 너무 많이 느낀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금이 가고, 스쳐 가는 손길 하나에도 오래 남는다. 나는 상처를 잘 입고, 회복은 더디다. 그 더딤 속에서 세상은 나를 재촉한다.
왜 아직 거기 있느냐고.
왜 아직 아프냐고.
왜 아직도 생각하느냐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오래 생각한다. 생각은 나의 고집이다. 생각은 내가 멈추지 않는 방식이다. 세상이 나를 눌러도, 생각은 틈을 찾아 자란다. 콘크리트 사이의 풀처럼, 보기 흉하다고 뽑혀도 다시 돋아난다. 나는 그 풀을 사랑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았지만, 아무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생명.
가끔은 나 자신이 초라해 보인다. 대단한 혁명도 없고, 거창한 성공도 없다. 다만 오늘을 버텼다는 사실 하나뿐. 그러나 어쩌면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멈추라고 말하는 세계에서,
완전히 멈추지 않는 것.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것.
완전히 무감각해지지 않는 것.
나는 오늘도 작게 흔들린다. 누군가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는 하루였겠지만, 내 안에서는 작은 지진이 몇 번이나 지나갔다. 나는 그 지진의 진앙을 기억한다. 기억은 나의 지도다. 언젠가 길을 잃어도, 나는 내가 어디서 흔들렸는지 알 것이다.
세상은 내일도 멈추라고 말할 것이다.
조용히 하라고, 적당히 하라고, 여기까지만 하라고.
그러나 나는 안다.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거창하게 달리는 것이 아니라는 걸. 때로는 아주 느리게, 거의 보이지 않게, 그러나 끝내 사라지지 않는 호흡 같은 것이라는 걸.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다시 들이마시는 일. 그 단순한 반복이 곧 저항이라는 걸.
나는 오늘도 숨을 쉰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 아직은 멈추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자랑스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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