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밤의 동굴

필요와 욕망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by 구시안

시계는 감지할 수 없는 자신의 꿈에서 내려온다. 맹렬히 추격하는 것들을 피해 다니다가 드디어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빛을 숨긴다. 감은 내 눈 속에 새벽이 뿌리 내리고 있다.


낮이 베풀어 준 모든 것을

나는 밤에게 바친다.


한낮의 근심은 가벼운 웃음에 부서진다. 감미로운 말보다 끝내 남는 것은 솔직한 말, 나는 그것을 되뇌며 진실의 낮은 울림을 따라간다. 순수한 시선을 마주한 순간, 자신의 선택을 따르겠다는 속삭임은 메아리처럼 오래 남는다. 서로 손을 내밀지는 않았지만, 의심 없는 존중은 조용히 꽃이 되었다. 정해진 시간 속에서 몇 번의 삶을 지나듯, 나는 여러 문턱을 넘어왔고 그때마다 또 하나의 봄이 태어났다.


다시 태어난 봄.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다섯 손가락처럼,
붙잡고도 흘려보내는 의지 속에서
사람과 함께 머무는 짧은 시간은
오랜만에 진솔했다.

모두가 평화를 원하면서도
쉽고 가벼운 길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떠나고 싶어지는 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 사람의 선택은
완성되어 있었으므로.


문명이라는 도시, 높은 건물과 좁은 거리 사이에서 나는 페인트가 벗겨진 나무 탁자를 만지작거린다. 적당한 피로와 건강한 신체가 주는 감각은 분명한데, 마음은 이상하게도 편안하지 않다. 보이지 않는 벽에 둘러싸인 듯 나는 일하는 손끝으로 바람 부는 대나무 숲을 떠올린다. 이 감각이 나만의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인공적인 것이 자연이 되고, 자연이 낯설어진 세계에서 이런 생각쯤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라 여길 뿐이다.


이 도시라는 광활한 들판을 내가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그 들판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옷을 입은 존재만이 나체의 아름다움을 말하듯, 삶의 저항 속에서 더욱 힘을 얻는 수치심은 묘하게도 관능을 품는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인공과 자연의 경계를 조용히, 그리고 무심히 혼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늘은 활짝 개어 있었고 봄이라고 무색하게 여름을 연상시킬 정도로 태양은 따갑게 내리쬐고, 밤이 깊어가자 구름은 맞은편 강변 쪽으로 이미 흘러 사라졌다. 비를 기대하는 날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텅 비고 가늠할 수 없는 날이면 멀리 검은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이 혹시 비였으면 하지만, 청량한 날의 적막한 차가움만이 여전히 도시를 메우고 있었을 뿐이다.


나의 문학적 취향과는 다르게
날씨마저 뜻대로 흐르지 않는 날이면,
애매한 기억 속에서
다른 하늘이 떠오른다.


어쩌다 스치는 선명한 꿈처럼
그렇게 낮은 흘러가 버렸다.


흩어진 어둠 몇 점이
하늘 곳곳에 이지러져 있고,
느껴지지 않는 바람만이
조용히 지나간다.


늦은 귀갓길,
택시 창밖으로 한강을 바라보다가
버려진 듯 길게 누워 있는 섬 하나를 본다.


아무도 닿지 않는 섬.

차창을 열자
그곳에서 흘러온 듯한
희미한 냉기가 스며든다.


밤은 깊어지고,
어둠은 강변 위로 낮게 내려앉아
남아 있던 낮의 흔적을
조용히 지워낸다.

밤이 깊어가고 어둠은 강변으로

내리누르듯이 낯게 깔려

낮을 없앤다.


성공의 환상이고 지랄이고

가장 솔직한 시르죽은 병적인 본질이

고스란히 드러는 것이다.

모든 것이 벗겨진다.

그것이 밤이다.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혼동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을 하루에 수놓은 발자국들을

다시 밟고 가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삶을 유지하고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혹은 불필요한 것들을

쟁취하고

제거하면서

완전한 삶

완전한 행복

꿈의 실현을 원하면서.

인간이기에 필요한 것을 원하고

사람이기에 필요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이다.


하늘의 달을 따서

자신의 손에 넣을 방법이 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달려들 것이다.

그것을 낭만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름 개성이 강하고 위풍당당한 인간으로 살아보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런 삶을 시도하는 나 자신이 우스워 견딜 수 없었다. 최상의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은 평범한 사람들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고, 낭만주의의 병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반대로 뒤집으면 드러나는 것이다.


꿈의 미학적 가능성이란 늘 웃길 만큼 충분히 현명한 것이란 걸 알게 됐음에도 여전히 낭만주의를 비판만 하며 끝나지 않는 반복된 삶을 사는 사람. 소수의 사람만이 누리고 있는 그것을 알 수는 없으나, 유명인사가 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싶다. 그들도 인간이고 사람이기 때문에. 내게 일어날 리 없는 꿈은 꾸지 않는다.


벌떼처럼 모여든 군중들로 박수갈채를 받는 사람을 존경하지도 선망하지도 않는다. 조잡한 가구와 꿈에서조차 나를 졸렬하게 만드는 너절한 물건 나부랭이에 부딪힐 것이 자명하기에. 모든 환상은 적당히가 좋다.


나이는 늘 항상 나에게 알려주었다.

타인을 통해 살아가야 할 새로운 이유들을.

보이는 손길마다 존재와 미덕을 갖고 찾아와

환희와

분노를

스스로

아니, 서로에게 각성시키며 모든 시간을 통해

서로를 온전히 만들어가게 되는 운명을 타고난

지나가는 계절처럼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

이보다 더 매혹적인 존재가 있을까.

끝없는 하루를 준비하는 밤에

새겨지는 사람들이 웃고 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쇠약하고 섬세한 세포들을 간직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뿐이다.


안개와 이슬의 길 사이

존재하는 이정표 같은

희미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어른으로 만드는 사람들.

이보다 매혹적인 것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 사람들은 홀로 검은 눈물을 흘린다.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을 뿐이다. 그 눈물은 동굴과 동굴로 옮겨 다닌다. 아무도 길 잃을 염려는 없지만, 외로운 깨끗한 동굴 안에 피어나는 것은 고독이다. 동굴 벽을 따라 내내 자신을 꿈꾸며 스스로를 보게 된다. 입술을 수천 가지의 꽃으로 장식한 태양아랫사람들을 피해 들어온 고요한 정원이다. 공기의 가벼운 고백에 고백을 거듭하면 수증기가 생겨 비가 된다. 확실한 공간인 순수해진 대기 안에서 습관이 구멍 낸 지체된 시간을 메워주길 바라지만,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갈 뿐이다. 섬세한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기를 겁내하고, 숨기며, 감추기 바쁘다.


밤이면 그 동굴에 숨어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혼자이길 좋아하질 않는다.

피로의 단념의 휴식의 낮은 그림자 안에서 살기에 지쳐버린 줄도 모르고 사람은 사람을 원하고 바란다.

태양과 밤은 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속으로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무력한 기림이 묻은 손을

씻어낸다.

이미 지나버린 행동으로 인해

이미 내뱉어버린 말로 인해

스스로를 자학하며

깨끗해지길 원하며

타고난 밤과 그 공포를 씻어낸다.


사람들 간에 일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과 불은 단 하나의 계절을 위해 벌거벗을 뿐

사람과 사람도 서로를 벌거벗기기 바쁠 뿐이다.


수많은 시선이 똑같이

공평하게 나눌 시선이라는 것은 없다.

섞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세상에 이미 자신이 만든 세계의 크기는

스스로를 담글 수 있을 정도만 허락한다.


모든 동굴 밖에서

자신 밖에서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기에

지쳐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정구슬처럼

밤과 섞이기 시작한 시간에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존재하기 위해 애쓰며

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존재하기 위해 애쓰는

밤이 깊어진다.






Rêves d'automne


앙드레가뇽의 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을 남겨봅니다.

"가을의 꿈들" 이라는 제목의 곡입니다.

일곱 번의 밤이 금세 지나가버립니다.

이것도 살아가는 이유라면

이유일 것입니다.


시간 속에 과연 갖게 되는 것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 상태에서

낮을 경험하고

밤에 자리하며

매일 글을 쓰려 노력하고

빛을 찾아봅니다.


낮의 1분이 그렇게 급박하게도 지나가는데

밤의 1분이 이렇게 느리게 느껴지는 밤.

그것이 항상

나의 몫이라는 생각이 물드는 밤에

글을 남겨 봅니다.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brunch membership
구시안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자각(自覺). 나의 비릿한 언어가 향기로워질 때까지 천천히 걷기로 하다. 브런치 +169

937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9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65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5화느리게 흘러가는 달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