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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는 것

공감과 소멸 사이에서

by 구시안

제어되지 않은 공감은

끝없이 확장되어

스스로를 잃게 되어 있다.

마음이 없이는

공감(共感)도 없으니까.


공감은 결국

자신을 벗어나는 일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불가피하게

자기 자신에서 멀어진다.

짧던 길던 말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날씨처럼

따사로운 낮의 산책을 끝내고

어떤 심리적 지배도 없이

최대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서점에 들러

숨어 있는 책들을 찾아내

성스러운 글들을 눈에 담는다.


넘기는 책장 사이사이에도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글자들이 영글었다.


자신의 운명과 시련을 나열한 책들.

시련과 기쁨은 그들의 프레임 밖에서

얼굴들을 내놓고 있다.

시큼한 글자들을 씹어본다.

망원경이 필요 없이

별빛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듯

책을 쓴 이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 노력한다.


번개처럼 순식간에 공감이 생기는 구절을 바라본다. 상대가 느끼는 걸 느끼는 것.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하게 되는 짧은 순간이 스친다. 심장이 가슴에 빠져나와 글을 쓴 사람의 가슴속에 깃드는 것과 같은 묘한 느낌. 손끝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게 하는 구절을 곱씹는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닿게 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의도나 계산 없이

이루어진다.


마치

다정함만 존재하듯

책을 움켜쥐게 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

나에게는 신기한 일이다.


내가 살아가며 누군가를 진정으로 만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사람을 좋아하여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는 사람도 있는 반면, 고독한 사람이 존재하듯 혼자를 즐기는 사람도 존재한다. 혼자만의 느끼는 경이로움의 공감이 무색하진 않다. 누구와 나눌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생각하며 산지도 오래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책을 쓴 사람들을 이렇게 서점에서 만난다.

그들이 세상에 낸 책이라는 것.


책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오래 붙잡고 있던 어둠의 모서리를 조용히 접어 건네는 일이다. 그 안에는 이름 없는 날씨가 있고, 한 번도 지나 본 적 없는 거리들이 이미 지나간 것처럼 눅눅하게 눕혀져 있다.


나는 그것을 펼칠 때마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눈으로 내가 아닌 시간을 흘려보낸다. 문장들은 때로 술처럼 기울고 의미는 내 안에서만 완성되는 그림자처럼, 끝내 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끝내 열쇠를 찾지 못해 잠깐 슬쩍 구경만 하고 돌아서야 하는 비밀화원처럼.


그래서 책이라는 것은 읽는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려 쓰는 영혼의 자세에 가깝다. 어떤 책은 나를 가볍게 부수고

어떤 책은 내가 부서졌다는 사실을 조용히 승인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나는 알게 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무언가가 분명히 바뀌었다는
그 설명할 수 없는 기울어짐을.


책이라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남긴
끝내 닿지 못할 고백의 형식이다.


진열장에 놓인 책들 모두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길 바라듯 환한 곳에 자리하여 웃고 있다. 그곳을 지나 가장 구석진 서랍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책을 뒤적인다.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책들 중에는 이미 나의 책장에 자리를 잡은 책이 많다. 소멸돼 가는 그 책 속에는 소중한 것들이 숨어 있다. 밝은 것을 애써 밀어내진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는다. 가장 숨은 곳에 자리한 흠집이 나 있거나 사람들의 선택에 거부당한 책들 중에는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했던 소중한 것들이 자리하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읽고 싶어도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하는 책이 있다.

가끔 영문판을 골라

스스로 사전을 끼고

번역을 선택해 보기도 한다.


비행기를 타고

책 한 권을 찾기 위해

소비할 여유는 없으나

아직도 번역되지도 않은

내가 사는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무궁무진한 내용들이 담긴

만나지 못한 작가들이 줄 서 있다.

전부 읽어보고 싶지만

기다려도 답이 없는 것처럼

사람들의 취향과

나의 취향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할 뿐이다.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나라의 성향과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 거나

사람들의 소비욕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내용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책 속의 내용도

어차피

사람이 섰고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잘 팔리는 것들만이 환한 곳을 차지한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공허한 트렌드,
사람들을 꼭두각시처럼 몰아붙여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소모하게 만드는 책들.

성공을 말하지만 결국은
누군가의 방식을 복제하라 강요하는 문장들,
돈을 버는 기술로 환원된 이야기들.

그것은 글쓰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마저 타인에게 위탁하라는 선언에 가깝다.

나는 그런 것들이
문학의 이름으로 끼어들어
그 순도를 흐리는 장면을
끝내 견디지 못한다.


환한 곳에는 늘 잘 팔리는 것들만 남는다.
트렌드라는 이름의 반복,
성공이라는 미끼,
사람을 태워 움직이는 문장들.

그건 글이 아니라
복제의 매뉴얼이다.

나는 안다.
그것들이 문학의 얼굴을 하고
가장 먼저 문학을 훼손한다는 것을.


사람들의 손이 많이 닿는 순서대로
책들은 줄지어 선다.
그 순위가 얼마나 공허한지 모른 채,
남이 읽으니까 읽어야 하는 책들.

나는 그런 책들을 사양한다.
읽어도 끝내 내 것이 되지 않는 문장들,
같은 옷을 입고 거리를 걷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공감하지 못한 글은
결국 남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 버릴 뿐이다.


나는 결국
누군가의 손때가 묻지 않은 문장 속으로
조용히 숨어들기를 택한다.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문장들은 제 온도를 되찾고
의미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갖는다.


공감이란
넘쳐흐르는 것이 아니라
끝내 남아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수많은 문장들을 지나고도
끝까지 나를 붙잡는 한 줄,
그 한 줄이
나를 벗어나게 하면서도
결국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을.


책장을 덮은 뒤에도
어딘가에 남아
조용히 숨 쉬고 있는 문장 하나.


그것이 나를 흔들고
다시 걷게 만든다.


책이라는 것은 아마도
읽히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안쪽에 머무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아무도 고르지 않은 책 한 권을 꺼내
또 한 번
나를 잃어버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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