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나 사이에서 사라지는 이름
가장 완벽한 구조로
펼쳐지는 우산 안에 들어가
빗소리를 듣는다.
불어오는 바람에서
느껴지던 예감은 비를 잠시 부르고
저무는 도시의 길을 거닐며
잠시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단 한 방울의 물의 요정들이 내려와
달궈진 도시를 적시고
내 두 팔 속에서 자리한 섬은
새로운 몸의 형태를 지니게 된다.
나는 우산을 들고 있지만
사실은 누가 누구를 들고 있는지 모른다.
비는 내 밖에 내리고
나는 내 안에서 내린다.
우산은 단지
하늘을 거부하는 작은 철학이다.
나는 그것을 펼치며
세상을 닫는다.
젖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덜 존재하기 위해서
빗소리는
내가 아닌 것들의 주장이다.
나는 그 아래에서
나조차 아닌 채 서 있다.
우산이 없다면
더 젖고
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이렇게까지
나를 의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벌거벗고 내리는
투명한 요정들을 환영할 뿐이다.
이 투명한 경계 안에는
서로의 적당한 간격이 자리하고 있다.
노트 위에
학창 시절 책상 나무 위에
놀이터의 모래 위에
어느 날 문득 찾은
바닷가 해변에
나의 이름을 써보는 것처럼
비라는 요정들도
하늘이 아닌 세상에 내려와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것이다.
남지 않고
다시
증발해
하늘로 올라갈 순간을
기다리며.
모든 백지 위에
누군가 태워버린 재 위에
아주 오래전 누군가가
새겨놓은 동굴 벽에
새겨진 누군가의 이름처럼.
자신의 이름을 써보는 것이다.
모든 창공의 누더기 위에
그 태양의 연못 위에
생기 넘치는
달 호수가 생기는
시간까지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림자들이 사라진 하늘 아래
비가 내린다.
하늘의 문은 누군가가
감시라도 하듯
어쩌면 사람들은
하늘 아래 갇힌 줄도 모르고
거리의 길은 폐쇄된 곳 없이
진압되는 곳 없이
문장해제 된 무방비 도시처럼
사람들의 이야기가 즐비하게
수놓는 네온사인들이 켜지고 밤이 찾아왔다.
밤이 오면
나뭇가지들은
감옥에서 나갈 길을 모색하듯
빗장을 친 하늘 아래
자신을 흔들어 감옥을 무너뜨린다.
그 나무는
나의 집 안에 있고
우리의 방 안에 있고
그 숲 속을 거닐며
자신의 어깨를
스스로에게 기댄다.
빛나는 두 손 사이로
솔직한 손을 만들기 위해
낮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고
홀로 남은 입술 하나를 굳게 다문채
가장 자신다운 노래를 하기 위해
사계절 상관없이
밤이면 가장 오랜 장작불을 피워놓고 앉아
누군가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혹은
내일이라는 순간을 준비하며
자신의 솜털에 감정을 새겨 넣는다.
답은 가까이에서 찾는 법이라지만,
사람은 천사가 아니기에
잃어버린 날개도 없거니와,
나뭇잎과 구름도
모든 꽃마다 자기 태양이 있듯이
모든 얼굴에 꽃이 활짝 피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은밀히 울리는 12시 자정을 가르치는 소리가 울리면
사방에서 불어오는 숨결이 느껴지는 내 입술은
공기에 섞인 원소들을 계산이라도 하듯
침묵의 노래는 잊히고
눈(眼)으로 새겨지는 모든 것들이
경사면에 붙들려 빛을 파내는
밤의 맑은 물을 마시기 위해
어둠 속에서
나는 나를 휘젓는다.
쾌락의 새들이 모여드는 밤도 아니지만,
하늘을 그리기 위해
준비해 놓은
맑은 물에 씻어 놓은 두 눈을 두고 앉아
마음 어느 구석에 낀 이끼 덮인 바위를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동안
부드럽고도 냉혹한
사랑했던 사람들이 떠오르는 순간이 오면
어제로부터도
오늘로부터도 오지 않은 빛깔들의 움직임
강렬한 밤의 빛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지나간 시간의 무질서에
밤을 없애기 위해
나는
깊은 꿈과 깨어남에 저항하며
오늘의 잠을 걸고 앉아
유리처럼 길을 손에 쥐어보기도 한다.
마법의 빛으로 가득한
가벼운 말로 가득한
이유 없는 웃음으로 가득한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산책하는 사람들은
푸른 부재의 밤하늘을 바라보고
떨어지는 비의 요정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증명의 순간도.
내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거리의 작은 호수처럼 일렁이는
물방울들의 물결 위에서
잠시
어린 시절의 모습을
밤새 지켜보기도 하며
들판에
대지에
태양이 잠든 검은 숲 속에 앉아
헐벗은 나무를 바라보며
낮의 기억도 없는 밤을
맞이한다.
단순하지도
복합적이지도 않은
24시간의 연속을.
모든 것에
그리고
모두에게
돌려주는 시간을 위해
밤의 끝을 향해
어떤 희망도 허락되길
걸어 볼 것이
내게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할 때까지
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감옥을 선택한다.
마음의 무더운 섬 안에서
밤과 끝없는 접촉을
다정하진 않은
모두가 고요히 마주하는
물이 아닌
불로 깨끗이 씻긴
추수를 시작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서러워하는 평평한 땅을
마음속에 그래도 숨 쉬는 땅을
다독인다.
나는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다.
그 둘 중 어느 쪽이 나인지
나는 결정하지 않는다.
결정하는 순간
이미 하나를 포기한 것 같기 때문이다.
자유는 아마도
선택의 수가 아니라
선택하고 있다고 느끼는 착각의 깊이일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강요받지 않는다
그래서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자유인가
아니면 원인이 너무 많아져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상태인가
나는 나를 만든다
그러나 그 만드는 행위는
이미 만들어진 방식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래서 나는
나를 선택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반복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견디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디에도 묶여 있지 않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벗어날 곳이 없는가도 생각한다.
아마도 자유란
출구가 없는 공간이 아니라
출구라는 생각이
끝없이 생겨나는 공간일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나가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나가고 있다.
그 투명한 경계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