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중독자 예니
42kg까지 살이 빠진 적 있다. 초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 때였다. 쇼윈도에 비친 나를 볼 때마다 너무 날씬해서 찰칵, 화장실 거울에 비친 좀비는 모르는 척하는 날들이었다. 이제는 아무리 극심한 스트레스가 와도 그때처럼 속수무책으로 빠지진 않는다. 아니 '극심'을 붙일 만한 스트레스가 없다. 덕분에 건강한 돼지가 되었지만 행복하다. 더 이상 "살 빼야 되는데"라는 못 지킬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만일 내가 다이어트를 한다면 그건 살 때문이 아니라 백세장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겠지.
아직 결심이 안 서서였을까, 이 인터뷰는 영 구미가 안 당겼다.
- 대상: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
- 질문: 다이어트 성공 비결은?
그래도 운동 중독 예니와의 인터뷰는 꿀잼.
주의: 대화가 다소 저속할 수 있습니다.
옛날엔 뚱띠였다고 들었는데 살을 뺀 건가요, 빠진 건가요?
교정과 갑상선 항진증 때문에 살이 급격히 빠졌고 본체 뚱띠 체질이라 현재는 몸무게 유지를 위해 피나게 노력합니다.
최고 몇 키로, 지금은 몇 키로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약 6년 전 62키로를 찍었고 현재는 50키로입니다.
그런데 체중 유지를 위한 노력이라고 하기엔 너무 빡세게 운동하지 않나요?
(웃음) 아니 사실 운동은 최근 들어서 재미 붙인 거라 득근을 위해 빡세게 한 거였고요. 살 빠진 지 한 4년 정도 되어가는데 평소 습관 자체가 오늘 많이 먹었으면 내일 안 먹는다든가 저녁은 늘 가볍게 먹거나 소식하거나 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상하다. 밤에 소떡소떡 먹는 사진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운동 후 하메가 소떡소떡을 만들어놔도요?
그럼 딱 한 개만 먹어요. 하메가 절 잘 알기에 적정량 이상 주지 않습니다.
인정머리 없네요, 둘 다
네. 하메가 늘 그런 말을 해요 개x이라고 밥 같이 안 먹어주는 쌍x이라고..
보디빌더라고 하나요? 그거 뭐야 근육질 시합
(웃음) 머슬매니아
어어 그거 언제 나가나요?
다음 달에 나가여
는 뻥이고 사실 진심으로 해볼까 했는데 트레이너 쌤이 정치판으로 변질되었다 해서 소신 있게 도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함
어머머 진심으로 해볼까 함?
예스^-^ 운동이 너무 재밌어서
'운동이 너무 재밌어서 한다'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나 같은 사람이 찰떡같이 알아들을 만한 비유가 없을까요?
게임 캐릭터 레벨업시키는 느낌
약간 처음엔 아무것도 없다가 열심히 해서 돈 벌면 장신구 하나 옷 하나 신발 하나 생기는 거처럼
원래 좀 무용하고 맹목적인 것에 매료되나요?
전혀 무용하고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운동은.
게알못의 선입견 반영 질문에 똑소리 나는 대꾸.
오.
저는 뭔가를 치장함으로써 꾸미는 것보다 제 자신을 가꾸는 게 더 재밌더라고요. 아시다시피 저는 극한의 고통을 즐기는 편입니다. 긴 시간에 걸려 뜨개질을 해서 옷을 만들었어- 보다는 정말 극한의 고통과 인내심에 따른 변화가 좀 더 자극적이더라고요 오홍홍^^ 점점 더 무거운 무게의 운동을 해내는 과정이 있어서 목표를 세우고 성취감도 얻을 수 있고요.
운동 게임 뜨개질 어쩜 우린 이렇게 다르네요. 완벽 무관심 종목들...
달라서 재밌음 언니랑 얘기하면
훌륭한 마인드세요 호호. 앞으로의 '자신 가꾸기' 행보가 궁금합니다.
(큰 웃음) 자신 가꾸기 행보..
특별한 거 없이 지금처럼 하되 긴 호흡으로 꾸준히 하는 게 첫 번째 목표고 몸무게랑 몸매에 강박 가지지 않고 건강하게 가꾸는 게 두 번째 목표. 과거에 지나친 강박 때문에 거식증이 왔었음.
님을 볼 때면 종종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의 실존으로 여겨질 때가 있는데요. 자신 가꾸기의 정신ver.을 위한 노력도 따로 하시나요?
사실 운동하면서 스트레스를 쫙 푸는 편이라 요즘은 그게 가장 큰 멘탈케어 방법인 것 같고. 또, 먼 미래에 여행을 계획해놓고 그것만 기다리면서 살기..?
(웃음)
(따라 웃음) 너무 없어 보여 대답? 나 진지한데.
좀 더 구체적으로 TMI 하자면, 이번에 끄라비 여행 같은 경우엔 한 6개월 전에 티켓팅 해놓고 한 달에 하나씩 여행을 위한 무언가를 했음. 숙소 3개를 한 달에 하나씩 찾아서 예약했고 숙소 예약 끝난 후엔 액티비티 찾기 - 구글맵 만들기 이런 식으로 한 달에 하나씩 계획을 차곡차곡.
인터뷰 즈음 예니는 끄라비에서 막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표현이 적절한 게, 사진을 하도 올려대서 체감상 이민 간 사람 같았기 때문. 실제로는 4박 6일이었는데.
아하 근데 끄라비는 솔까 비키니 화보 찍으러 간 거 아닙니까?
솔까말 그래서 운동도 열심히 했음
그렇게 올려댄 사진 중 절반이 살이었다.
선순환이군요 그래서 겨울 나라는 안 감?
흠.. 개인적으로 벗고 하는 여행을 좋아해서리..
흠.. 황급히 인터뷰 종료..
온라인에서 '페미' '탈코'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다. 페미는 페미니스트일 테고, 탈코는 뭐지? 검색해봤더니 '탈코르셋'의 약자란다. 브래지어를 입지 않고 제모를 하지 않는다는 페미니스트 얘기가 떠올랐다. '브래지어 벗으면 편하긴 하겠다. 나도 할 수 있을까? 근데 유두는 어떡해? 절레절레..' 딱 거기까지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불편한 나는 오랜 세월을 모른 척해왔다. 그런 단어가 필요한 사회를 부정하고 싶은 거였다. 과거형인 이유는 <나도 몰라서 공부하는 페미니즘>을 읽고 나서 마음이 움직인 탓. 내 얕은 글이 행여나 누군가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공부 삼아 읽은 건데, 숙연해졌다. 부끄러웠다.
책에서 말하는 탈코르셋은 브래지어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얼굴, 몸매, 화장, 다이어트, 하이힐과 같은 외적인 꾸밈 노동부터 예쁘다, 여성스럽다, 1등 신붓감, 시집가도 되겠다와 같은 얼른 듣기엔 칭찬 같지만 오랫동안 여성을 억압해온 행동 양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권리에 대한 경종이었다. 쉬운 예로, '여자가 쌩얼로 나가면 예의 없다는 소리 들으니까' 하기 싫은 화장을 한다는 건 자유롭지 못함이다. 꾸미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누가 보든 말든 화장한 내 얼굴이 맘에 들어서 하는 건 자유 의지다.
얼마 전 예니가 회사에 쌩얼로 나타났다.
"왜 화장 안 했어?"
- 회사 오는데 뭐 꼭 화장을 해야 돼?
책을 읽고 나니 내 질문이 부끄러워졌다. 반면 예니의 대답은 엄청 쿨했다. 멋있었다. 인터뷰 중에도 그랬다. 치장함으로써 꾸미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가꾸는 게 더 재밌다고. 그래서 운동을 하는 거라고.
이런 게 진정한 '탈코' 아닐까.
2018년 11월 한 달, 1일 1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인상 깊었던 인터뷰와 단상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