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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키미 Jan 30. 2019

그저 이름에 대해 물었을 뿐인데

의문의 드라이버 스티그


카피에 공 들여야 하는 프로모션을 기획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잘 모르는 분야(자동차, 게임, 낚시, 육아 등)가 섞여 있어서 동료들의 집단 지성을 이용했는데, 생소한 단어가 등장했다. 스티그.


'자동차'하면 '스티그'가 떠오른다고.

뭔데요 그게...?



(c) topgear.com


The Stig

: 영국 자동차 프로그램 <톱기어>의 테스트 드라이버


하얀 우주복에 헬멧 쓴 사람이 '의문의 드라이버'라는 캐릭터를 내밀었는데, 그쪽 씬에서는 스타인 모양이었다. 1대 스티그, 2대 스티그, 3대 스티그, 자매품 스티그, 파생형 스티그, 별에 별 스티그가 다 나왔다. 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음. 아무리 봐도 내 분야는 아니었다.



- 대상: 기억에 남는 이름을 가진 크루
- 질문: 이름을 바꿀 기회가 있다면 바꾸시겠어요?


영어 이름을 쓰는 회사이니만큼 별에 별 재기 발랄한 이름이 넘쳐나는 가운데 눈을 의심케 한 이름이 있으니 바로 'Stig'. 프로필 이미지도 딱 그 의문의 드라이버였다. 톱기어일 리는 없고 음. 후에 알게 된 현실 스티그는 알면 알수록 멋진 사람이었다. 헬멧은 안 썼다.





'스티그'라는 이름은 톱기어의 그 스티그와 관련된 것인가요?

네, 맞아요. 톱기어에 나오는 테스트 드라이버에게서 따온 이름입니다.


자동차를 좋아하셔요?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막 마니아 같은 건 아니에요. 


그런데 어쩌다가 스티그를?

제가 중점을 두었던 포인트는

- 겹치지 않고 짧은 이름

-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을 수 있는 이름

이었습니다.


후보에 올랐던 이름으로는 

- noona (모두가 나를 누나라 불러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 tesla (당시 테슬라에 꽂혀 있어서)

- tardis (Doctor Who #테닥테닥) 

등이 있었습니다.

갈팡질팡 하던 차에 짝꿍이 stig를 추천해주어 단박에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탑기어좋아합니다만 #마니아는아닙니다


스티그는 기획자다. 에버노트 활용 능력 최강에 기록 대장. 이 답변도 온라인상에 기록해둔 URL과 함께 왔다. 정리벽도 어마무시해서 <일잘러의 정리법>을 쓸 정도다.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가 궁금해요. 

오프라인으로 안 본 사이에서 회의하러 가면 90% 정도는 남잔줄 압니다. (웃음)

"어, 근데 스티그는 안 오세요?"

"제가 스티그입니다"


(웃음) 그럼 상대방이 뭐라고 하시나요?

스티그를 아는 사람은 차 좋아하냐고 물어보고, 모르면 뭐냐고 물어보세요. 프로필 이미지를 보고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90% 넘는 것 같아요. 95%인가...


그러고 보니 나도 스티그 실물을 처음 봤을 때 잠시 잠깐 '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스티그는 스티그라는 이름에 찰떡으로 어울린다. 두상이 예뻐서인가.


그런 질문이나 오해를 받을 때 어떤 기분이 들어요?

소소한 재미를 드려서 행복한?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하고 기억하기에 좋을 것 같고 차 이야기를 더 하는 경우도 있고. 여러모로 전 아주 맘에 듭니다. 


그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해보셨겠어요.

네. 마음에 쏙 들어요.


그나저나 스티그가 '누나'가 될 뻔했다니 흥미롭네요.

근데 제가 누나로 안 했던 이유 중 하나가, 만약 누가 자기 이름을 '오빠'라고 했다면 전 싫을 것 같았어요. 아무래도 회사니까. 재밌는 이름 많은 건 알았지만 그래도 내가 싫은 걸 남도 싫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 이름부터 알고 있다가 저를 만난 분 중에 그런 말씀하신 분도 있었어요. 본인이 생각한 이미지, 30대 중후반에 차 좋아하는 남성이 아니고 차 마니아도 아닌 것까지 어떤 고정관념? 스트레오 타입? 같은 걸 깨 줘서 고맙다고.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정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좋더라고요.


그 말해주신 분도 멋지네요. 저도 닉네임이 '킴프로'라서 자주 남자로 오해받는데 왜 그런 멋진 스토리가 없었을까요. (웃음)

(따라 웃음) 저는 본명도 홍OO이라 그런 오해에 익숙해요. 대학교 입학해서 처음 조편성할 때, 공대라 여학생이 한 명씩 배치됐는데 우리 조에 여자가 2명이었어요. 그래서 선배들이 "왜 저 조에 여자가 두 명이냐" 하면 "홍OO이 여자래요" 뭐 이런 식.


개인정보 주워서 우리 집에 학습지 팔러 온 아줌마도 우리 집에 와서 "오빠 나오라고 그래". 엥, 우리 집은 언니랑 나랑 둘인데. "홍OO 오빠 없니?" 하면 "제가 홍OO인데요" 뭐 이런 식.


꿀잼.


(큰 웃음) 만약 스티그 2세가 생긴다면 중성적인 이름을 지으시렵니까?

일단 2세 생각이 전혀 없지만. 만약 생긴다면 꼭 그럴 거예요. 이름뿐만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면 성별 특이성이 제거되는 편이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라고 믿습니다.


이름에서부터 박혀버리는 편견을 지우고 시작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스티그와 많은 대화를 나눠보진 않았지만 그의 기록을 훔쳐볼 때마다 구구절절 옳아서 경외심이 들곤 한다. 이 인터뷰도 그렇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로까지 이어졌으니. 그저 이름에 대해 물었을 뿐인데.


갑자기 궁금해지는데요. 남자 크루 중에서 '여자일 수도 있겠다' 싶은 영어 이름이 있었던가요?

딱히 없었던 것 같아요. 떠오르지 않네요.


저도.. 의외의 발견이네요.. 두고두고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이름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떤 이름으로 바꾸고 싶은지도 묻고 싶었는데, 그럴 생각 전혀 없음 + 꿀잼 이야기까지 고맙습니다.

(웃음) 저는 한글 이름도 엄청 아껴요.


예뻐요 OO

고마워요 혜민 :)





회사에서 나는 '키미'다. 이름 뒤에 콤마 찍고 문자를 더하면 회사에서 쓰는 고유 아이디가 된다기에 kimmy.pro라고 지었다. 닉네임 '킴프로'를 변형했다. 성이 이름이 된 셈. 쉽고 흔하지 않고 내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이름. 무엇보다 내가 지은 내 이름으로 불려서 좋다. 일부러 의식한 건 아니지만 '성별 특이성이 제거된' 이름인 것도 마음에 든다.


'혜민'이 싫진 않았다. 다만 '혜'자가 가진 이미지에 귀속되는 느낌에 저항 심리가 있었던 것 같다. 어른 말씀 잘 듣고 착하고 성실한 여자애 같달까. 혜정, 혜림, 혜영이들이 다 그랬다. 지혜, 은혜는 또 어떤가. 그래도 살면서 이름 가지고 놀림당한 적 없으니 다행. 씩씩대며 놀릴 거리를 찾던 친구가 "이, 이, 이, 민들레야!" 했을 때 어찌나 가소롭던지. 그래서 재희, 보연, 하나, 선영, 민아 다 안 부러웠는데 '명성', '도경'만큼은 부러웠다. 이왕이면 중성적인 이름을 가지고 싶었나 보다.


하루는 아빠가 담배를 푹푹 피우며 한숨을 푹푹 쉬며 미안하다고 했다. 

"니 이름에 획 많은 한자를 써서 니 인생이 복잡해 진거야. 내가 그때 판단을 잘못했어"

'인생은 이름 따라간다'의 과학적 근거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아빠는 엄청 진지했다.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혼자서 반성하는 꼴. 한자에 '바다 해'자가 들어가니 너는 바다 건너가면 잘 될 거라고도 했다. '마음 심'은 두 개 들어가는데.


세월이 흘러, 제주에 이민 가 살겠다고 까불 때. 

성산일출봉이 바라다 보이는 바닷가에 앉아 아빠랑 통화, 아니 통보를 했다.


"아빠. 나 제주도에 살려고"

"그래. 넓은 바다 보고 넓은 생각을 해라"


방금 엄마한테도 물었더니 같은 말이다.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살라고 지은 이름이야"


성별이고 어쩌고. '혜민'으로 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일 모양이다.







2018년 11월 한 달, 1일 1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인상 깊었던 인터뷰와 단상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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