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동료 D
회의 시간. 긴 테이블에 마주 앉아 대화하다가 갑자기 프레젠테이션을 띄우게 되었다. 정자세로 앉아있던 사람들이 화면을 보려고 일제히 몸을 돌리자 뒤통수가 하나, 둘, 셋... 화면에서 제일 멀리 앉아있던 나는 장애물에 가로막혔다. 까치발 들듯 고개를 이리 빼꼼 저리 빼꼼하며 적당한 시야를 찾는 상황. 그때 맨 앞에 앉았던 D가 뒤를 슬쩍 보더니 테이블에서 팔꿈치를 떼고 벽 쪽으로 의자를 쓱 빼는 게 아닌가. 그러자 뒷사람들도 조금씩 움직였고 일자(I)로 놓였던 의자가 사선(/)이 되면서 모두의 시야가 확보됐다. D는 기억도 못할 일이겠지만 그의 센스와 배려는 내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유능한데 사려 깊기까지 한 동료들과 일하고 있다. 매일 감탄하는 한편 나의 부족함을 마주하기 때문에 가끔 좀 쉬고 싶어도 떠밀려 성장할 수밖에 없는 환경. 복이다.
- 대상: 내가 아직 칭찬을 못해준 사람
- 질문: 당신이 제일 듣고 싶은 칭찬은 무엇인가요?
특히 자주 감탄을 자아내게 한 D에게 티 내어 칭찬한 적이 없는 것 같아 인터뷰를 청했다.
D가 제일 듣고 싶은 칭찬은 무엇인가요?
제가 가장 듣고 싶은 칭찬은
- 회사에선: 일 잘한다 + 같이 일하고 싶은 기획자다
- 집에선: 언니 언제 와? (= 보고 싶어)
- 친구들 만날 때: 한 잔만 더 하고 가자 (= 더 얘기하자)
- 애인에게선: 귀여움을 받고 싶은데 잘 얘기 안 해줍니다. 안 귀여워하나 봄
- 스스로에겐: 오늘 컨디션 좋네, 하고 자각하는 게 최고의 칭찬
불릿 달아서 구분하는 거 기획자들 병이다. (나도)
남들이 모르는 나의 칭찬 포인트가 있다면?
'제가 타인에게'인가요, 아니면 '타인이 저에게' 칭찬할 때 설레는 포인트인가요?
글쎄요. 둘 다 듣고 싶네요. (웃음)
1. 제가 타인에게 칭찬할 때는
- 쑥스러워서 칭찬 잘 못함. 진심을 말해도 마음에 없는 말하는 것처럼 서걱거림. (발연기 톤)
- 회사에선 플젝 끝나고 회고할 때 굿잡 메시지를 보낼 수 있어서 좋아요. 말보다는 텍스트.
- 가족들은 칭찬을 요구하는 스타일이라 그냥 듣고 싶은 말을 고스란히 해주는 편.
- 친구들한텐 축하한다 이런 말 외엔 칭찬해 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 애인한텐 뭐만 하면 귀엽다고 칭찬하는데 싫어하네요.
2. 타인이 저에게 칭찬할 때는
- 칭찬받는 상황 자체를 사실 되게 쑥스러워해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훅 치고 들어오는 게 좋아요.
- 칭찬보다는 그냥 눈 마주쳤을 때 편하게 웃어주는 게 제일 좋음. 눈빛으로 대화할 때 신뢰가 오가는 것 같아서 좋아요. 단편적으로 뭘 잘한다, 어떻다, 보다는 저에게 호감 갖고 있다는 기분 자체가 칭찬인 것 같아요.
넘버링+불릿도 마찬가지.
'저에게 호감 갖고 있다는 기분 자체가 칭찬' 이거 무척 공감되네요. 회사, 가족, 친구, 애인, 본인 중 지금 가장 목마른 칭찬은 무엇인가요?
와. 최근에는 회사요. 칭찬 들을 일이 없음.
후후. 잘 됐다.
혹시 저의 눈빛 칭찬을 받아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많이 보냈는데 이게 텔레파시 같은 거라 전달이 잘 됐는지 확인할 길이 없네요.
오. 눈으로 잘 웃는 편이셔서 구분을 못 하겠지만 그간의 얼굴이 다 호감 인상이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이건 또 처음 듣는 칭찬이다? 내 눈은 웃을 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웃음) 되려 이게 칭찬 같네요.
자, 봐봐요? 저는 지금 질문 두 개를 던졌을 뿐인데 D는 칭찬을 카테고리화, 다각화하고 각각의 칭찬을 본인 시선으로 해석했어요. 이런 포인트에서 매번 놀라요. 천상 기획자라고 생각합니다. 최소 주 1회 이상 마음속으로 칭찬했어요. 근데 말로는 전해본 적이 없더라고요.
뭐지, 이 톡방은. 칭찬 감옥인가요? 1:1이라 나가지도 못해.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칭찬 가뭄에 단비가 내리길 바라요. 마침 오늘 비도 내리고 좋네요.
굉장히 칭찬을 잘하는 분이군요 키미는. 솔직하고 직설적인 편인 줄은 알았는데 뭔가 부끄럽다...
너무 박력있었나 보다. 나도 부끄럽다.
칭찬도 직설적으로 냅다 해야죠. 부끄러움은 감내하세요.
(외면)(웃음)
예상치 못한 순간에 훅 치고 들어갔는데 거 되게 쑥스러워하셔서 1절만 하고 끝냈다.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프롤로그에서 말했다시피 이 인터뷰 프로젝트는 20명의 멤버와 함께 했다. 모두 같은 주제로 각자의 주변인을 인터뷰하는 거라 멤버들의 인터뷰 글 보는 재미가 쏠쏠, 유익, 그리고 이렇게 머리를 '댕' 울리기도 했는데.
- 남편 이승민 씨를 인터뷰한 릴리의 글 -
(요즘 욕을 하도 먹어서 칭찬이 고팠을 것 같은) 이승민을 (대놓고 칭찬해주기 위해) 인터뷰했습니다. 아침밥을 같이 먹으면서.
Q. 아 참, 그런데 혹시 요즘 듣고 싶은 칭찬이 있어?
ㄴ음, 칭찬이라고 하면 남이 나를 평가했을 때의 결과인 거자나.
Q. (동공지진) 음… 그렇긴 하지.
ㄴ글쎄, 고등학교 때까지는 늘 부모님, 선생님의 칭찬이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했던 거 같은데 대학교 들어오면서는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 교수 당신이 뭔데 나를 평가하냐. 별로 남들의 평가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듯.. (그래서 졸업학점이 그 모냥..) 회사 와서도 좀 그랬고. 당신들이 뭔데 나를 평가하냐 그런 마인드가 있었지.
좀 충격적이었다. 술 (많이) 좋아하고 주사가 좀 (마이) 있지만 ‘본투비 순종’인 줄 알았던 캐릭터의 반전을 보는 기분. 결혼 4년 내내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써가며 주도적인 집안일을 그렇게 유도했건만 결국 씨알도 안 먹힌 이유가 이거였나…10년을 알고도, 4년을 함께 살고도, 모르는 게 이렇게나 많다. 이 프로젝트 참 좋네. 앞으로 당근은 빼고 채찍만 사용해야겠다.
나도 동공지진.
'칭찬 = 평가'라는 관점은 상상도 못 해봤는데, 너무 일리 있는 말이라 당황스러웠다.
칭찬은 손쉬운 관심의 표현이라고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였대도 '평가'를 내포한 표현이 아예 없었다고 할 수 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반대로 칭찬을 받고 순수하게 기뻤던 기억도 많은데. 어떤 가치를 좇아야 할까? D의 대답에 힌트가 있었다. 회사 밖에선 '언니 언제 와?', '한 잔만 더 하고 가자' 등을 칭찬으로 여기는 반면 회사에선 '일 잘한다', '같이 일하고 싶은 기획자다'라는 칭찬을 듣고 싶다는 말. 눈빛으로 보내는 호감의 신호가 최고의 칭찬이라는 말.
회사에서의 평가는 연봉으로 이어진다. 회사에서 오가는 칭찬 속에는 내가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어떤 일을 잘하는지 등이 담겨 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칭찬은, 그게 눈빛이든 말이든 작지만 확실한 성취감을 준다. 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더 잘 해내야 할 일도 파악할 수 있다. 결국 회사에서의 칭찬은 필수불가결 아닐까? 더 나은 일잘러가 되어 더 높은 연봉을 받기 위해서라도.
그러니까 나에게 칭찬해 달라.
(성과 평가 기간이라 하는 말 아님)
2018년 11월 한 달, 1일 1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인상 깊었던 인터뷰와 단상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