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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키미 Feb 01. 2019

블록놀이 친구

김별아초코케잌


할머니의 학구열은 내 나이 여섯에 발현했다.

우리집에 놀러온 7살짜리 언니가 내게 동화책을 읽어준 사건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크게 충격 받았다. 입학 전인 어린이가 한글을 읽는다는 것에 한번, 그걸 들으며 손녀가 즐거워한다는 것에 또 한번. 그때까지 내게 동화책을 읽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는 한글을 몰랐다. 할머니는 동화책을 읽어주기보단 한글을 가르치는 쪽을 택했다. 다음 날 당장 내 손을 붙잡고 동네에서 제일 유능하다는 속셈학원에 갔다. 유치원이 아닌 속셈학원. 다행히 어린이 김혜민은 배움이 빨랐다. 8살 언니 오빠들과 경쟁하는 받아쓰기에서 만점을 받아간 날 할머니는 비로소 안도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원장 선생님이 할머니를 불러 "혜민이가 그림에 소질이 있어요. 미술학원에 보내서 제대로 가르쳐 보시는 게 어떨까요?" 했을 때 기뻐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하던 할머니의 얼굴과 그때의 공기가 기억난다.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미술학원에 가고 싶냐는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 없는 아이가 조부모 손에 이끌려 친척집에 가는 일은 곤욕이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를 대하기 어려워했고, 아이도 그런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었다. 몇몇 어른은 친해진답시고 "아빠는 요즘 뭐하시니?"라고 물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집에 가자"고 할 뿐이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아랑곳 않고 요즘 얘 때문에 얼마나 살 맛 나는지를 자랑했다. 그제야 친척들은 나와 눈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거나 궁둥이를 두드리거나 예쁘다는 말을 해 주었지만, 눈빛에 담긴 측은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한 친척집에서 블록놀이 한 날이 잊혀지지 않는다. 먼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그런 날은 "니가 상구 딸이니?"부터 시작해야되기 때문에 배로 고통스럽기 마련인데, 블록놀이에 푹 빠져 그런 말이 다 안 들렸다. 우리집엔 블록이 없었다.



별아를 처음 만난 날 블록을 선물한 건 그래서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라는 일곱 살 아이. 주말마다 꼬박꼬박 엄마 아빠에게 찰싹 달라붙어 지내고 너무나 화목한 가정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지만, 어쩐지 블록이 필요할 것 같았다. 블록놀이를 함께 해줄 수 있는 친구가 가니까.


핑크핑크한 카카오프렌즈 캐슬 브릭을 내밀자 별아는 눈도 못 마주치며 꾸벅 인사를 했다. 어색함은 박스를 뜯을 때부터 사라졌다. 복잡한 설명서를 해석하면서 함께 캐슬을 완성하는 1박 2일 동안 별아는 행복해 보였다. 완성 후 찍은 기념 사진을 폴라로이드 필름으로 인화해 줬다. 두 번째 선물이었다.



하지만 인터뷰는 현실. 다시 말하지만 김별아초코케잌은 일곱 살이다. 시골 마을에서 깨발랄하게 뛰어노는 아이다. 코를 자주 판다.

- 대상: 나보다 15살 이상 어린 친구
- 질문: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어른들이 별아한테 꿈이 뭐냐고 많이 물어봐요?

아니요? 많이는 안 물어봐요.


시나리오에 없는 답이 돌아왔다. 별아는 쇼파에 거꾸로 누워 박쥐 흉내를 냈다.


"그럼 별아 꿈이 뭐야? 엄마도 궁금하다"


미취학아동을 인터뷰할 때는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다.


별아 꿈이 뭔지 말해줄 수 있어요?

마법사요!


헉. 동공지진.

꿈을 갖는 것보다 꿈꾸지 않을 자유를 갖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이 질문을 던지는 게 조심스러웠다. 자의로는 꺼내지 않을 질문이라서. 그런데 꿈이 마법사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마법사가 왜 되고 싶어요?

장난감을 뿅, 만들 수 있으니까! 마법봉도 만들 거예요.


마법봉이 있어야 마법사가 되는 거 아니예요?

마법은 손으로 부리는 거예요. 해리포터도 못 봤어요?


헉.

음.. 어.. 저..


"아빠가 마법사는 뭐라고 했지?"


아빠의 도움도 필요하다.


과학자!

아니. 백수될까?

아니다. 집도 사야돼!

왜냐면 이층침대를 사야되거든.

이층침대면 숨바꼭질도 잘 할 수 있거든요.


SF에서 갑자기 현실 세계로 점프. 이거면 인터뷰는 충분할 것 같다.





별아 엄마 N언니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혬님'

별아가 그걸 '햇님'으로 알아듣곤 창 밖의 해와 나를 번갈아 보며 "햇님이 둘이야" 했다. 해를 바라보며 눈을 잔뜩 찌푸리고 "햇님아 눈부시다"라고도 했다. 입은 웃고 있었다.


그러다 해가 지자 나를 '달님'이라고 불렀다.







2018년 11월 한 달, 1일 1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인상 깊었던 인터뷰와 단상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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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올린 후, 사진 한 장이 왔다. “혬님 덕분에 별아 꿈이 특별해졌어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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