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대장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부터 인터뷰 핑계로 친해지고 싶은 사람까지, 매일 다른 사람을 인터뷰하며 인터뷰어 역할에 익숙해졌다. 컨디션 좋은 날은 하루에 두 세명도 인터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한 명도 인터뷰하기 벅찼는데 말이다.
프로젝트 후반부. 자만을 비웃듯 고난이도 주제가 떨어졌다.
- 대상: 가상의 대상
- 질문: 자유 질문 + 인터뷰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주제 제시자는 캐릭터, 동물, 식물, 무생물을 예로 들었다.
이번엔 가상 인터뷰다.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해 주세요.
혜민(6세)의 상상 속에 사는 외계인 대장입니다. 푸른색 몸에 크고 길쭉한 귀, 구부정한 등을 가졌습니다. 우주에 살고 있고, 핸드볼 공만 한 구슬로 매일 혜민을 지켜봅니다.
상상 속에 산다니, 얼른 상상이 안 돼요.
혜민의 세계는 자신 외에 모든 사람이 외계인이에요. 그중에 제가 대장이고요. 대장인 저는 우주에서 혜민을 지켜보고, 지구에서 사람 모습을 하고 사는 외계인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어요.
맙소사.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도 외계인인가요?
네. 그걸 아는 혜민은 행동이 늘 조심스러워요. 의심도 경계심도 많고요. 잘못을 저지르면 제가 우주로 데려와 버릴까 봐. 지난번엔 안방 벽에 낙서를 하길래 '드디어 사고 좀 치나'하고 들여다봤는데 보일락 말락하게 하다 말더라고요. 한 번은 할아버지가 "어른보다 앞서 걸으면 안 된다"고 가르친 적 있는데, 그걸 또 철석같이 지키고요. 사촌 오빠 언니들과 걸을 때조차 뒤꽁무니에서 걸어요. (웃음) 겉으로는 그냥 말 잘 듣고 순하고 낯가림 심한 어린이예요.
외계인 부하들은 어떤 일을 하나요?
그냥 그 세상 사람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그들의 임무입니다. 만에 하나 시나리오에 변수가 생기면 저에게 보고해요.
시나리오와 변수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혜민이 고난과 역경을 겪지 않도록 짜인 시나리오예요. 그걸 해치는 변수를 관리하는 게 저의 일이고요. 이를 테면, 혜민이 2세일 때 할머니가 죽을병에 걸렸었어요. 큰일 날 뻔했죠. 시나리오상 혜민이 14세가 될 때까지 할머니 임무가 컸거든요. 그래서 필살기를 모아 할머니를 겨우 살려냈어요. 좀 말이 안 되긴 했는데, 기적이라는 단어로 적당히 얼버무리게 했어요. (웃음)
그런 비하인드가 있었군요. 역시 말이 안 되긴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그런 일을 하는 건가요?
나는 혜민 때문에 존재합니다.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요?
하지만 혜민은 상상 속의 당신을 무서워하는 거 아닌가요?
아직 어리잖아요. 자기감정을 잘 모를 나이니까. 엄연히 말하면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나의 존재를 의식하는 거예요. '지금 외계인 대장이 날 보고 있을까? 아냐, 자고 있을지도 몰라' 이런 식의 생각이니까요. 그 덕분에 자기 생각과 행동에 자문자답하는 습관이 생겼고, 스스로와 친구가 된 거라고 봐요.
어쩌면 혼자 있는 외로운 시간이 당신을 만들어낸 걸 수도 있겠네요.
덜 외롭게 결핍을 통과하는 방법을 찾아낸 셈이죠. 본능적으로.
혜민은 언제까지 당신을 의식할까요?
글쎄요. 저의 존재가 필요 없어질 때까지? 하지만 시나리오는 언제까지나 유효할 거예요.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지 궁금해요. (웃음)
후에 어른이 된 혜민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애썼다고, 기특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근데 저를 잊어버리지 않았을까요? 그러길 바라요.
[내성적인 면도 있으나, 자기 일을 철저히 해내는 능력 있는 어린이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통지표에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선생님한테 목도리 매달라는 말을 못 해서 선생님이 말 걸어줄 때까지 한참을 서서 눈치 보던 어린이였다. 생일파티에 친구를 초대하는 법을 몰라 할머니가 처음으로 차려준 생일 상 앞에서 혼자 앉아 우는 어린이였다. "우리 엄마가 엄마 없는 애랑 놀지 말래"라고 말하는 친구 앞에서 눈만 꿈뻑이던 어린이였다. 쓸데없이 눈이 컸다.
하지만 할머니는 나를 당당하게 키워냈다. 다행히 공부를 곧잘 했고, 발표하는 게 재밌었고, 그래서인지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학급 임원을 도맡게 됐다. '너에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꾸준히 용기를 주신 선생님도 있었다. 가정교육 운운하는 집 아이들이 학교에서 더 나쁜 행동을 일삼는 걸 보며 내가 받는 사랑이 더 건강한 교육임을 일찍이 깨달았던 것 같다. 친구 엄마들은 "혜민이 할머니가 골랐으니까"라는 이유로 내가 다니는 학원에 제 자식을 들여보냈다. 겁 많은 큰 눈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외계인 대장을 이토록 건전한 방식으로 마주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애썼다고, 기특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2018년 11월 한 달, 1일 1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위 인터뷰를 끝으로 당시의 기록을 마칩니다. 정기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이 경험을 발판 삼아 갖춰진 형식의 인터뷰를 진행해 보고 싶어 졌어요. 종종 다른 인터뷰로 찾아올 기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