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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카드를 찍는 순간, 무대에 오른다

커튼콜 없는 9시간

by 하루

"지금부터 연극을 시작합니다." 암전이 되고 핀 조명이 켜진다. 관객들의 숨죽인 시선이 무대로 쏟아진다. 나는 아마추어 연극배우로 3번 무대에 섰다. 대사를 외우고, 동선을 익히고, 타인이 되어보는 그 시간이 꽤 짜릿했다.


주변 사람들은 내 연기를 보고 놀라워했다. "너 무대 체질이구나?" "어쩜 그렇게 안 떨고 잘해?" 나는 으쓱하며 웃었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내가 연기에 자신 있었던 이유. 음… 그건 아마도, 내 사회생활 자체가 거대한 연극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출근 카드를 찍는 순간, 무대에 오른다. 오늘 내가 맡은 배역은 '밝고 유능하고 긍정적인 직장인'이다.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 진짜 좋죠?" 톤은 '솔' 톤으로, 입꼬리는 15도 올리고, 눈은 반달 모양으로. 대사는 완벽하다. 회의 시간에는 "아, 좋은 아이디어네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라며 적극적인 직원을 연기하고, 회식 자리에서는 분위기가 처지지 않게 텐션을 올리는 분위기 메이커를 연기한다.


사람들은 나의 연기에 속는다. 아니, 감탄한다. "진짜 에너지가 넘쳐요." "성격이 어쩜 그렇게 밝아요? 파워 E(외향형) 맞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다. '성공했네. 오늘도 들키지 않았어.' 사실 나는 내향적이다. 예민하고, 소심하고, 정적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의 불안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조용히 있으면 사람들이 지루해할 거야.' '어둡게 있으면 나를 무능하게 볼 거야.' '거절하면 나를 싫어할 거야.' 그 불안을 감추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밝음'을 연기한다. 이건 기만이 아니다. 나에게는 처절한 생존형 메소드 연기다. 물 밑에서 미친 듯이 발버둥 치지만 물 위에서는 우아해 보이는 백조처럼, 나는 물 밑에서 미친 듯이 불안해하지만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 연기한다.


문제는 이 연극에는 '쉬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직장에 있는 9시간 내내 나는 팽팽하게 긴장 상태다.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고, 내 대사가 적절했는지 검열하고, 혹시 연기가 어색하지 않았나 끊임없이 체크한다. 전화벨이 울려도 긴장하고, 점심시간에도 연기하고, 복도에서 마주친 동료에게도 웃으며 손 흔든다. 9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긴장을 풀 수 없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 비로소 조명이 꺼진다.


"커튼콜은 없다." 가방을 던져두고 씻지도 못한 채 소파에 시체처럼 늘어진다. 방금 전까지 하하 호호 웃으며 떠들던 에너자이저는 온데간데없다.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으면 얼굴 근육이 뻐근해온다. 하루 종일 웃는 가면을 쓰고 있느라 경련이 일 것 같다. 거울을 보면 낯선 사람이 있다. 눈은 휑한데 입만 웃고 있는 기괴한 얼굴. '아, 오늘 연기 너무 빡셌다.' 입 밖으로 한숨이 푹 나온다.


누군가 나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렇게 밝게 지내면 좋지 않아? 긍정적인 거잖아." 하지만 그건 진짜 긍정이 아니라 '대출받은 에너지'다. 내일 쓸 에너지, 모레 쓸 에너지까지 미리 끌어다가 '밝음'을 연기하는 데 써버린 것이다. 그러니 집에 오면 빚쟁이에게 쫓기듯 방전될 수밖에. 가족이 말을 걸어도 대답할 힘이 없어 짜증이 튀어나간다. "아, 나 좀 내버려 둬. 힘들다고." 밖에서는 세상 친절한 천사인데, 집에서는 예민한 짜증쟁이. 이 간극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


다정함에도 체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그 체력을 '연기'하는 데 다 써버렸다. 그러니 정작 가까운 사람들에게 다정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다. 나참,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그래서 요즘은 조금씩 '발연기'를 시도해 보는 중이다. 너무 완벽하게 웃지 않아도 된다. 모든 침묵을 내가 채우지 않아도 된다. 가끔은 "아, 오늘은 좀 피곤하네요"라고 솔직한 대사를 쳐도 된다.


며칠 전, 회식 자리에서 굳이 마이크를 잡지 않고 구석에서 조용히 고기만 구웠다. 불안했다. '사람들이 나보고 변했다고 하면 어쩌지?' '분위기 깬다고 싫어하려나?'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동료가 고기를 받아먹으며 말했다. "오늘 편해 보여서 좋네요. 맨날 챙겨주시느라 바빠 보였는데." 아, 관객들은 생각보다 내 연기에 집착하지 않는구나. 나 혼자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라도 된 듯 긴장하고 있었구나. 그들은 내가 주인공인 연극을 보러 온 게 아니라, 그냥 같이 밥을 먹으러 온 거였는데.


어제는 더 나아갔다. 동료가 "오늘 괜찮으세요? 좀 피곤해 보이는데"라고 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니에요! 괜찮아요!"라고 웃으며 부정했을 텐데, 어제는 솔직하게 말했다. "네, 오늘 좀 피곤하네요." 그게 전부였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동료는 "그럼 오늘은 일찍 들어가세요" 하고 말했다. 에라이, 이렇게 간단한 거였어? 인생은 연극이라지만, 24시간 무대 위에 있을 수는 없다.


이제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연습을 한다. 가면을 벗고, 화장을 지우고, 그냥 불안하고 소심한 '나'로 돌아오는 시간. 억지웃음 대신 무표정으로 있어도 되는 시간. 텐션을 올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냥 있는 그대로 있어도 되는 시간. 그 정직한 시간이 있어야, 내일 또 무대에 오를 힘이 생긴다.


완벽한 연기를 할 필요는 없다. 가끔 발연기를 해도 괜찮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 연기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할 뿐이다. 완벽한 배역이 아니라, 그냥 나를. 오늘은 집에 가서 아무 말도 안 하고 멍하니 있어야지. 오늘의 공연 끝. 막을 내립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4분의 3을 잃어버린다." -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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