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은 기억이 안 나요
봄이 왔다. 창밖을 보니 나무에 연두색 잎이 돋아나고, 길가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다. 바람도 차갑지 않다. 겨울이 끝났다.
작년 가을, 나는 우울했다. 9월부터 시작되는 불안, 부드러운 바람이 무서웠고, 단풍처럼 서서히 번지는 우울, 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불안. 그때 나는 가을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견뎠다. 겨울도 지나왔다. 그리고 지금, 봄이 왔다. 작년 봄은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계절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꽃이 피는지, 날씨가 따뜻해지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하루하루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 밥을 먹는 것, 출근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전쟁이었다. 하루에 20시간을 자고, 콜라만 마시고, "누가 나를 좀 안 죽여주나?" 하고 생각하던 그때. 봄이 왔는지도 몰랐다. 그때의 나는 봄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벚꽃이 피어 있는 걸 봤다. 그리고 멈춰 섰다. 그냥 한참 쳐다봤다. '아, 예쁘네.' 그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고 평범한 생각. 하지만 그게 얼마나 소중한 감정인지 안다. 작년 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 올해는 느낀다. 물론 완전히 좋아진 건 아니다. 여전히 불안하다. 여전히 약을 먹는다. 여전히 가끔 무너진다.
어제도 그랬다. 여러 가지 걱정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회복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 작년 같았으면 며칠을 끌었을 텐데, 어제는 30분 산책하고 오니 좀 나았다. 몸을 움직이면 불안이 조금 가라앉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다시 일어났다. 약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출근했다. 그 과정이 예전보다 조금 덜 힘들다.
봄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따뜻해진 게 아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추위가 물러가고, 햇살이 따뜻해지고, 나무에 잎이 돋는다. 2월 말쯤, 아직 춥지만 해가 조금 길어진다. 3월 초, 바람이 차갑지만 꽃망울이 맺힌다. 3월 중순, 어느 날 문득 "따뜻하네?" 하고 느낀다. 그렇게 봄은 온다.
나의 회복도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좋아진 게 아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졌다. 처음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됐고, 그다음엔 밥을 먹을 수 있게 됐고, 그다음엔 출근할 수 있게 됐다. 점심을 혼자 먹을 수 있게 됐고, 전화를 받을 수 있게 됐고, 회식 자리에서 조용히 있어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봄을 느낄 수 있게 됐다.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다. 극적인 반전도 아니다. 그냥 어느 날 문득, "아, 나 좀 나아졌네?" 하고 느끼는 것. 봄처럼.
어제 퇴근길에 공원을 걸었다. 벤치에 앉아 하늘을 봤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바람이 불었다. 따뜻했다.
그냥 그렇게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예전에는 이런 시간이 무서웠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이 찾아왔으니까. 그래서 늘 뭔가를 해야 했다. 핸드폰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생각을 하거나. 하지만 어제는 그냥 앉아 있었다. 그게 괜찮았다.
불안이 오지 않았다. 아니, 왔지만 견딜 만했다. 작년 가을만큼 크지 않았다. '아, 봄이구나.' 그 생각이 들었다. 나무도 낙엽을 떨구고 겨울을 버텼다가, 봄이 오면 다시 잎을 틀어낸다. 나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가을에 무너지고, 겨울에 버티고, 봄에 다시 일어선다. 매년 그럴 것이다. 가을이 오면 또 우울해질 수도 있다. 겨울이 오면 또 힘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봄이다. 그리고 봄이 온 것처럼, 또 다른 봄도 올 것이다. 완치는 아니다.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약을 먹고, 여전히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봄은 왔다. 내 마음에도, 내 삶에도. 작년 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은 느낀다. 벚꽃이 예쁘다는 것, 바람이 따뜻하다는 것, 하늘이 맑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
오늘 아침, 창문을 열었다. 따뜻한 바람이 들어왔다. 새소리가 들렸다. '봄이구나.'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봤다. 연두색 잎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나참, 살아있네. 1년 전, 극심한 무기력으로 침대에 누워 "누가 나를 좀 안 죽여주나?" 했던 그 사람이 지금 여기 있다. 커피를 마시며 봄을 느끼고 있다. 기적이다. 작은 기적.
오늘도 나는 약을 먹는다. 출근한다. 일한다. 퇴근한다. 평범한 하루. 하지만 그 평범한 하루 속에서, 나는 봄을 느낀다. 그걸로 충분하다. 작년 가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매년 가을이 두렵다.' 맞다. 두렵다. 올 가을도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매년 가을을 겁내지만 매년 지나왔다는 것을. 겨울도 지나왔다는 것을. 그리고 봄은 또 온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계절을 따라 살아간다. 무너지고, 버티고, 일어서고. 또 무너지고, 또 버티고, 또 일어서고. 그게 회복이다. 완치가 아니라 회복. 계절처럼 돌고 도는 것.
어제저녁, 퇴근하고 집 앞 편의점에 들렀다. 아이스크림을 샀다. 봄이니까. 따뜻하니까. 집에 와서 창문을 열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커튼이 흔들렸다. 행복했다. 크게 행복한 건 아니었다. 그냥 조금, 평범하게, 일상적으로 행복했다. 그 평범한 행복이 1년 전에는 없었다. 지금은 있다. 그게 봄이다. 오늘 점심엔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쬐어야겠다.
봄이 왔으니까. 그리고 살아있으니까. 나 좀 잘하고 있네.
"봄은 자연이 '다시 시작하자'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 로빈 윌리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