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을 터놓는 순서
커밍아웃: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사상이나 지향성 등을 밝히는 행위라는 뜻으로 확장되어 쓰이기도 한다.
나는 정신과 병원을 다닌다. 병명은 불안장애. 그리고 지금 약 3년 가까이 병원을 다니고 있다. 아직 진행형이고, 언제 병원을 그만 다닐지도 모른다. 실제로 정말 힘들었던 적도 있었고, 죽음의 사선에서 외줄 타기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약을 잘 챙겨 먹고 사람 구실을 하고 있다.
나는 비밀을 터놓는 순서가 있다. 보통 비밀을 쉽게 말할수록 그 사람과는 나와 관계가 먼 경우가 많다. 이 사람과의 인연은 나와 길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는 쉽게 말할 수 있다. "저 정신과 다녀요." 어차피 다시 안 볼 사람이니까. 동료에게는 조금 더 어렵다. 매일 보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말할 수 있다. 회사를 그만두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가장 비밀을 털어놓기 힘든 사람이 있다. 바로 가족이다. 그중에서도 우리 아빠. 아빠를 원망한 적도 있다. 예민하고 꼼꼼한 성격을 가진 아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아빠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아빠가 자책하면 어쩌지.' '실망하시면 어쩌지.' '내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어쩌지.' 그래서 숨겼다. 2년 넘게.
그러다 우연치 않은 기회에 털어놓게 되었다. 차가 수리할 곳이 생겨, 당시 업무로 너무 바빴던 나는 집 근처 사시는 아빠에게 대신 수리점에 가기를 부탁했다. 그러다 병원 영수증을 들키고 말았다. '○○ 정신과의원' 그 글자를 보시고는 조심스럽게 아빠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뭐 어떻게 숨기겠는가?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응, 나 정신과 다녀. 좀 됐어." 평소에 큰 목소리로 나에게 말씀하시는 아빠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랬구나." 침묵이 흘렀다. 길고 긴 침묵. "그래, 저녁이나 조만간 같이 먹자." 얼렁뚱땅 전화를 끊으셨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실망하셨나.' '뭐라고 생각하실까.' 며칠이 지났다. 아빠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나도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응, 나야. 목요일 저녁 시간 있니?" "네, 있어요." "그래. 6시에 ○○ 식당 앞에서 보자."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식당에 앉았다. 아빠는 메뉴를 보시다가 말씀하셨다. "뭐 먹을래?" "아무거나요." "그래."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음식이 나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여전히 침묵. 식사를 반쯤 했을 때, 아빠가 입을 여셨다. "약은 잘 먹고 있니?" "네." "병원은 잘 다니고?" "네." "그래." 또 침묵. 그러다 아빠가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 네?"
"내가... 너를 이렇게 했나 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빠 잘못 아니에요." "아니다. 내가 너무 완벽하게 하라고, 잘하라고만 했지. 네가 힘들어하는 건 몰랐다." "아빠..." "괜찮아지는 거지?" "네,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 다행이다." 아빠는 잠시 말을 멈추셨다가, 또 말씀하셨다. "사실은 나도 젊었을 때 힘들었다. 병원까지는 안 갔지만, 잠도 안 오고 불안하고 그랬어. 그때는 정신과라는 게 없었으니까. 그냥 혼자 버텼지." "... 그러셨어요?" "응. 그래서 네 마음 조금은 알 것 같다. 힘들지?" 목이 메었다. "... 네. 힘들었어요." "이제 괜찮아. 병원 다니고 약 먹으면서 좋아지는 거잖아. 부끄러워할 거 없어. 아프면 병원 가는 거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밥을 한 숟가락 떴다.
그날 이후, 아빠는 가끔 전화를 하신다. 평소에 전화 같은 거 잘 안 하시는 분인데,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쯤 전화가 온다. "뭐 하니?" "그냥 집에 있어요."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마라." "네." "밥은 먹었니?" "네, 먹었어요." "그래." 길지 않은 대화다. 5분도 안 되는 짧은 통화.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안다. 나를 걱정하시는 마음. 미안해하시는 마음. 그리고 사랑하시는 마음.
가족에게 커밍아웃하는 건 어렵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섭다. 실망시킬까 봐, 걱정시킬까 봐, 자책하게 만들까 봐. 하지만 말하고 나니 알았다. 가족은 나를 사랑한다. 내가 아프다고 해서 사랑이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챙겨준다.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실망하신 게 아니었다. 걱정하셨고, 미안해하셨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조심스러우셨던 것뿐이었다.
한동안 생각했다. 진작 말할걸. 2년 동안 혼자 숨기고, 혼자 원망하고, 혼자 버텼는데. 말했더라면 아빠도 나도 조금 덜 외로웠을 텐데. 괜히 혼자 겁먹고 있었네. 오늘 저녁, 내가 먼저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 "응, 왜?" "그냥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전화기 너머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 그래. 밥은 먹었니?" "네, 먹었어요. 아빠는요?" "나도 먹었다." "그럼 됐네요." "응." 또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서먹서먹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냥 잘못했다가는 왈칵 눈물이 날뻔해서.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 생각에 빠졌다. 눈물도 나고 웃음도 나고. 나참, 이런 게 가족이구나.
"가족은 우리가 가장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