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가을밤

낯선 사람들의 위로

by 하루

"자, 여러분! 이분에게 큰 박수 한번 주세요!" 짝짝짝. 전역을 일주일 앞두고 참여한 사회 복귀 프로그램. 강사는 내 심리검사 결과를 보고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MBTI는 INFP, 에니어그램 4번. 개성이 뚜렷하고 낭만적이며 풍부한 감성을 지녔네요. 틀에 박힌 군대라는 조직에 적응하기 참 힘들었겠어요." 위로인지 동정인지 모를 박수였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맞다. 나는 억지로 구겨 넣어진 퍼즐 조각처럼 그 시간을 견뎌냈다.


10월 17일, 가을 아침. 나는 드디어 군복을 벗었다. 그리고 곧장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나를 찾는 여행'이라며 떵떵거렸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군 복무 중 헤어진 여자친구의 흔적을 좇아 떠나는, 조금은 찌질하고 궁상맞은 이별 여행이었다. 부끄럽지만 인정한다. 그것은 도피였다. 그리고 동시에 생애 첫 홀로서기였다.


10월의 제주는 육지와 달랐다. 은빛 억새가 파도처럼 일렁이고 낙엽이 구르는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처음으로 계절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군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맞이하는 첫 번째 진짜 가을이었다. 그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풍경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왁자지껄한 게스트하우스. 낯선 사람들과 둘러앉은 테이블 위로 맥주 캔 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누군가 툭 던진 사랑 이야기가 신호탄이 되었다. "사실 저는요…."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군대 이야기, 아픈 이별 이야기, 퇴사 후의 막막함,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까지. 평소라면 꾹꾹 눌러 담았을 속마음이 대나무 숲을 만난 듯 쏟아져 나왔다. 서로의 이름도, 직업도 모르는 사이였기에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솔직할 수 있었다. "저도 회사 그만두고 왔어요." "저는 이별 여행이에요."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전시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를 보듬었다. 창밖에는 풀벌레 소리가 깊어가는 가을밤을 채웠고,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우리는 묘한 온기를 나눴다.


그날 밤 나는 깨달았다. 치유는 혼자 방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 오는 게 아니라, 나의 약함을 타인 앞에 꺼내 보일 때 시작된다는 것을. 내가 나의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보였을 때, 상대방도 자신의 상처를 꺼내 보였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반창고가 되어주었다. 나참, 낯선 사람한테 이렇게 솔직해지다니. 그로부터 몇 번의 가을이 더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때와는 다른 종류의 아픔인 '불안장애'를 겪고 있다. 한동안 나는 이 병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혼자 삭이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견디려 했다. 하지만 문득 그해 제주의 가을밤이 떠올랐다. '아, 그때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서로를 구원했었지.' 그래서 나는 용기를 냈다. 가까운 동료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나의 불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 사실 좀 힘들어요." "나 약 먹고 있어요." 놀랍게도 반응은 그때의 게스트하우스와 비슷했다. "사실 저도 힘들어요." "저도 공황장애 겪었어요." 내가 빗장을 푸니, 사람들도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확인하며 안도했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우리 모두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구나. 그 해 가을, 제주가 나에게 알려준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연대의 힘이었다. 가을에 낙엽이 떨어져야 봄에 새잎이 돋는 것처럼, 무언가를 떠나보내야만(나의 약함을) 비로소 새로운 것이(위로와 치유가) 채워진다.

그때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은 이제 희미해졌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밤 우리가 주고받았던 투박하지만 따뜻했던 위로만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 시절, 제주의 가을을 함께 건넜던 당신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 저, 잘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흔들리고, 가끔은 불안하고, 또 다른 아픔을 겪고 있지만, 그날의 기억 덕분에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또 다른 가을을 맞이하고 있을 당신들도, 부디 안녕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불안 속에 있는 당신에게도 말하고 싶습니다. 혼자 앓지 마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으세요.

낯선 위로는 때로 가장 가깝고, 그 온기는 생각보다 오래갑니다. 오늘 밤엔 맥주 한 캔 따야겠다.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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