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전에 줄 위의 종달새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 작품 역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기획한 체코 거장 이리 멘젤 영화 시리즈 중 하나였다. 사실 나는 거지의 오페라를 보고 싶었지만 놓쳤고, 마지막 상영일에야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천재 감독”, “체코 영화의 신화를 창조한 인물”, “희비극의 거장.”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은 유난히 휘황찬란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화려함을 알게 된 이후 오히려 영화에 온전히 몰입하기 어려웠다. 작품이 아니라 ‘거장’이라는 이름을 먼저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aura)’를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먼 것의 일회적인 현현”이라고 정의했다. 발터 벤야민에게 아우라는 양가적인 개념이었다. 예술의 고유성을 설명하는 동시에, 작품을 경배의 대상으로 고정시키는 힘이기도 했다. 그가 경계했던 것은 바로 그 지점, 비판적 거리를 지워버리는 태도였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본 것일까, 아니면 ‘거장 이리 멘젤의 영화’를 본 것일까.
가까이에서 본 기차는 체코의 작은 시골역을 배경으로, 철도원이 된 한 청년의 성장통을 그린다. 그는 차장 여인을 사랑하지만 서툴고, 그 서툼은 종종 희극적 상황을 낳는다. 관객은 웃는다. 그러나 그들이 놓인 시대는 독일 점령하의 체코라는 암울한 역사적 배경이다. 가벼운 몸짓과 대사들 뒤에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리 멘젤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는 듯하다.
비극을 정면으로 밀어붙이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뜬금없어 보이는 결말조차 비극을 비극처럼 소비하게 만들지 않는다. 희극의 표면 아래 남는 잔여 감정, 그것이 오래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관에서 나눠준 팸플릿을 떠올렸다. 감독의 경력, 체코 뉴웨이브의 역사, 검열과 제작 환경, 수상 이력. 그 정보들이 영화 위에 겹겹이 덧씌워지면서, 나는 어느 순간 ‘감동받을 준비가 된 관객’이 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동을 기대하는 태도는 과연 순수한가.
예전에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과 이런 문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감독의 의도와 제작 배경을 아는 것이 감상에 도움이 되는가. 된다면, 그것이 작품 평가에 얼마나 결정적인가.
그는 맥락을 아는 사람이었고,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해를 말했고, 나는 경험을 말했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생각한다.
감독의 이름, 배우의 이력, 제작의 난관은 작품을 이해하는 배경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작품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영화는 결국 스크린 위에서 완성된다. 상영이 시작되는 순간, 그것은 감독의 손을 떠난다.
아우라가 개입하는 순간, 우리는 작품을 향해 다가가는 대신 무릎을 꿇는다.
나는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싶지 않다.
가능하다면, 평평한 눈높이에서 만나고 싶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히려 배경지식 없이 처음 보았던 그때의 감각을 더 신뢰하게 된다.
거장이기 때문에 좋은 영화가 아니라,
좋았기 때문에 거장이 된 영화.
아마도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작품 앞에서의 작은 민주주의일 것이다.
누구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거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마주할 수 있는 권리.
아우라가 아니라, 경험으로 남는 영화.
작품은 설명되기 전에 경험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