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담그는 정과 시간의 의식
그제야 겨울이 온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았다.
보름쯤 늦어진 김장을 마치고 나서였다.
달력 위에서 '때를 놓쳤다' 말은 쉬워도, 막상 그 틈을 비켜간 시간은 얼마나 냉정히 우리를 재촉하는지 실감한다.
김장은 늘 '정해진 때'를 요구한다.
배추가 가장 단단해지는 순간, 고춧가루가 숨을 고르고, 젓갈이 제맛을 낼 수 있는 그 찰나의 틈.
그 틈을 놓치면, 재료는 흩어지고, 가격은 솟구치니, "김장이 금장이 됐다"는 농담 속에는 사계절 질서에 순응해야 했던 우리 삶의 오래된 긴장감이 배어 있다.
김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자연이 허락한 수확을 붙잡아 아직 오지 않은 겨울이라는 시간 속으로 안정을 옮겨 심는 일.
미래를 향해 오늘을 저축하는 행위이자, 불확실한 계절 앞에서 인간이 선택한 가장 소박하고도 단단한 생존의 방식이다.
이번 김장은 유난히 힘에 부쳤다.
절임배추의 편리함을 뒤로하고 농산물도매시장에서 직접 들여온 배추 스무 포기.
아파트 욕실에서 배추를 절이는 일은 원초적인 노동이었다.
90킬로그램의 무게, 염분을 맞추는 기다림, 손보다 먼저 허리가 기억해 버린 고된 작업.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고통 속에서 마음은 맑아졌다.
노동이란 늘 그렇다.
몸이 힘들수록 생각은 단순해지고, 단순해질수록 마음은 정직해진다.
배추 한 포기 다루는 손길에 잡념은 없다.
오직 이 겨울을 누군가와 함께 무사히 건너려는 마음만 남는다.
김장 육수를 끓이고, 3.2킬로그램의 고춧가루를 풀어 속을 버무리는 스물네 시간의 과정.
우리는 시간을 압축해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기다릴 때를 기다리고, 손이 가야 할 만큼 손을 쓰고, 서둘러서는 안 될 순간을 지켜내는 일. 그 모든 과정이 모여 김치 한 통이 된다.
손에 남은 붉은 흔적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노동의 상처이기 이전에, 다가올 계절을 위해 기꺼이 내어준 시간의 증거.
김장을 하며 우리는 맛을 담는 것이 아니라 정을 주입한다.
그래서 김치는 먹을수록 배를 채우기보다 마음을 데운다.
이제 김장은 절대적인 생존의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맘때가 되면 우리는 김장 통을 꺼내 "조금이라도 해야지" 한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언젠가는 김장을 하지 못하는 날이 오겠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이 의식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한국인의 정이고, 살아온 시간의 기억이다.
총각무 열 단으로 담근 총각김치에는 님은 양념 재료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으려는 살림의 지혜가 담겼다.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남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 그 태도야말로 오랜 세월 이 땅의 사람들이 고난을 견뎌온 방식이었다.
김장은 결국 시간을 존중하는 일이다.
다가올 추위를 두려워하기보다 함께 이겨낼 마음을 먼저 담는 일. 그래서 김장 통에 담기는 것은 김치가 아니라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제 담근 김치는 식탁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제 역할을 다했다. 시간과 노동, 말없이 이어져 온 사랑을 고스란히 품었기 때문이다. 이 겨울, 김치 한 젓가락을 집어 들 때마다 나는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계절을 담그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