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기획 팀장 일기 7편
전략기획실에서 일하다 보면
누구보다 먼저 현실을 보게 된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그 현실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회사는 늘
현실보다 ‘듣고 싶은 말’을 원할 때가 있다.
오늘은 그 두 세계가
정면으로 충돌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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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없을까요?”
오전 보고에서
나는 예상보다 3개월 늦어지는
신규 투자 일정안을 설명하고 있었다.
자료의 첫 장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연 불가피. 일정 재조정 필요.”
말을 끝내자
임원 한 분이 조용히 말했다.
“팀장님, 이거…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없을까요?”
그 말의 진짜 뜻을 나는 너무 잘 안다.
- ‘사실은 알겠지만,
CEO가 보기엔 너무 무겁다.’
- ‘부정적인 메시지는 부담스럽다.’
보고서의 문장은 그대로인데
그 문장의 부담을 줄여달라는 요청.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전략이란 감정을 달래는 기술이 아니다.
사실을 움직이는 기술이다.”
그러나 조직은 언제나
사실보다 감정을 먼저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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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줄을 놓고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
임원은 다시 말했다.
“지연은 지연인데,
그래도 ‘대응 가능’ 같은 표현을 넣으면
조금 덜 불안하지 않겠어요?”
나는 자료를 바라봤다.
숫자는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 예정 공정 지연
- 자재 수급 불안정
- 파트너사 일정 확인 불가
지금 상황은
‘대응 가능’이 아니라
‘대응을 준비해야 하는’ 단계였다.
그래서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긍정적인 표현을 쓸 수는 있지만,
그게 상황을 바꾸진 않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완화가 아니라 재정의입니다.”
순간 회의실이 잠시 멈췄다.
보고는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아니고,
결재는 사실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전략기획팀장은 그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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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닙니까”
회의가 끝난 후
다른 임원이 나를 따로 불렀다.
“팀장님은…
가끔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닙니까?”
나는 조용히 웃었다.
전략기획팀장의 솔직함은
때로는 칭찬이지만,
때로는 위험한 태도로 보인다.
그 임원은 덧붙였다.
“위에서는 가끔
‘알고 있어도 모른 척해야 하는’ 순간이 있어요.”
나는 대답 대신
잠시 침묵했다.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고 있었다.
조직은 때로
현실보다 ‘조직의 속도’를 선택한다.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현실을 무시한 속도는
결국 더 큰 사고로 되돌아온다는 것.
그래서 나는 말했다.
“제가 아닌 다른 팀이라면
그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략기획은
현실을 가장 먼저 말해야 하는 팀입니다.”
그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해한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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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원들에게 들려준 말
오후에 팀원 두 명이
내 자리에 와 앉았다.
“팀장님,
오늘 아침 보고… 많이 힘드셨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말은 해야지.”
그들은 내 표정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우리가 보고서를
너무 직설적으로 쓰는 건 아닐까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직설적이어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야.
근거 없이 낙관적인 게 문제지.”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현실을 정확하게 말하면
처음엔 다들 불편해 해.
하지만 그게 결국 모든 사람을 살리는 길이다.”
그 말에 둘은 미묘하게 웃었다.
안도와 긴장이 섞인 웃음.
보고서 뒤에서 함께 버티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내가 팀장으로 서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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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결재선 앞에서 느낀 감정
오늘 하루 마지막으로
결재 시스템을 열었다.
아침에 올린 보고안이
최종 승인 처리되어 있었다.
결재 코멘트는 단 한 줄.
“사실 기반의 판단. 그대로 진행.”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오늘 하루 흔들렸던 마음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보고는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이 아니라
현실을 움직이는 기술이다.
그리고 전략기획팀장은
그 현실에 가장 먼저 발을 들이는 사람이다.
나는 컴퓨터를 끄기 전에
결재 문장 하나를 오래 바라봤다.
“사실 기반의 판단.”
그래, 결국 중요한 건 그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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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 줄
조직은 때로 듣고 싶은 답을 원한다.
하지만 회사를 살리는 건
듣기 어려운 사실을 먼저 말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