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은 왜 항상 먼저 망가질까
조직에는 늘 비슷한 질문이 떠돈다.
“왜 저 사람은 항상 힘들어 보일까?”
이 질문의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 사람이 착하기 때문이다.
착하다는 말은
성격이 좋다는 뜻이 아니다.
조직에서의 ‘착함’은 보통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문제가 생기면 먼저 책임을 떠안는다
분위기가 깨질까 봐 할 말을 삼킨다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쉽게 한다
이건 미덕처럼 보이지만
조직 안에서는
가장 먼저 소모되는 자질이다.
착한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는 대신
관계를 보호하려 한다.
회의에서
말이 어긋날 것 같으면
한 발 물러선다.
지시가 모호해도
다시 묻지 않는다.
“내가 알아서 하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더 잘했어야 했나”부터 떠올린다.
그런데 이 태도는
아주 빠르게 오해를 낳는다.
착한 사람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동의로 해석된다.
괴물은
이 지점을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
그들은
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된다.
단 한 번만 경계를 넘으면 된다.
착한 사람은
그 한 번을
“내가 참자”로 넘긴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경계는 기준이 된다.
처음엔 부탁
그다음엔 당연
마지막엔 의무
이렇게 착한 사람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가장 많은 일을 맡고,
가장 많은 감정을 감당하고,
가장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럼에도
평가는 늘 비슷하다.
“저 사람은 잘해.”
“근데 좀 약해.”
“관리해줘야 해.”
착한 사람은
망가지기 전까지
자기가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왜냐하면
망가지는 과정이
폭력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야근은 헌신으로,
침묵은 성숙으로,
양보는 팀워크로 포장된다.
그렇게 포장된 말들 속에서
착한 사람은
조금씩 자기 기준을 내려놓는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이 정도는 내가 감당할 수 있어.”
“지금은 참아야 할 때야.”
그 ‘지금’은
끝나지 않는다.
나는 예전에
착한 사람이었다.
누군가 불편해질까 봐
내 감정을 뒤로 미뤘고,
조직이 흔들릴까 봐
내 기준을 낮췄다.
그 결과
조직은 잠시 편안해졌을지 몰라도,
나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착한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 조직은
결국
착함을 소모품으로 쓰는 조직이라는 것을.
착함은
약점이 아니다.
하지만 착함을
스스로의 방어선 없이 내어주는 순간,
그건 조직 안에서
가장 위험한 위치가 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착해도 된다.
다만, 항상 먼저는 아니다.
조직은
당신의 선의를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의 침묵은
아주 정확하게 학습한다. 그리고 그 학습이 끝났을 때,
망가지는 건
늘 같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