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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죄책감은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by Henry




1부. 인간이라는 미궁


인간을 이해하는 일은 언제나 미궁을 걷는 일과 닮아 있다.

우리는 매일 선택하고 흔들리고 후회하면서

마음의 복도와 그림자 사이를 끝없이 돌아다닌다.


고전문학은 그런 미궁의 지도를 먼저 걸어본 사람들이

남겨둔 발자국과 같다.

죄책감에 꺾인 이들의 숨소리,

세상의 부조리에 눌리면서도 자신의 길을 찾으려 했던 고민,

사랑에 무너졌지만 다시 일어나려던 몸짓까지

이야기 속 인물들은 각자의 어둠을 건너

조금씩 인간으로 완성되어 갔다.


1부는 그런 발자국 위를 따라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이렇게 흔들리며 살아가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새로운 언어로 다시 묻는 여정이다.


우리는 문학을 읽는 동안

타인의 고통을 마치 내 일처럼 아파하고

타인의 선택 속에서 내 삶의 윤곽을 본다.

런 과정은 결국

나라는 사람의 깊고 복잡한 미로를

천천히 밝혀나가는 행위다.


1부에서는

죄책감, 부조리, 욕망, 그림자, 무력감처럼

인간을 흔들어온 핵심 감정들을 따라가며

세계문학의 인물들이 보여준 ‘미궁 속의 발걸음’을 들여다본다.

그들의 흔들림은 우리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다 읽고 난 뒤

문득 깨닫는다.

인간이라는 미궁에서 길을 잃는 일은

결국 길을 찾는 첫걸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01. '죄와 벌', 죄책감은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 인간 심연의 가장 깊은 어둠과 빛을 바라보았다. 라스콜니코프가 저지른 살인은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를 무너뜨린 것은 칼이 아니라 양심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을 단죄하는 것이

법의 형량이 아니라 내면의 회계(會計) 임을

조용한 문장들 사이에 숨겨두었다.


범죄보다 깊은 것은 ‘죄의식’이다. 라스콜니코프가 범행 이후 느낀 고통은 도망치는 자의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균열이었다.

인간에게 죄책감은 잘못의 징표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징표다. 만약 아무런 고통도 없다면 그는 이미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죄책감은 인간을 파괴하지만 동시에 되살린다. 죄책감은 라스콜니코프를 괴롭게 만든다.

몸은 도망칠 수 있지만 마음은 끝내 숨지 못한다.

그러나 고통이 그를 다시 ‘인간’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고통을 느끼는 능력,

자기모순을 견디는 능력,

그리고 죄를 인정하려는 작은 흔들림.

이것이 그를 구원으로 이끈 첫걸음이었다.


구원은 형벌이 아니라 ‘고백’에서 시작된다. 라스콜니코프가 구원되는 순간은 시베리아가 아니라 고백의 순간이다.

진실을 말하는 행위는 세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오는 길을 여는 문이다.

자기 파멸을 인정하는 용기,

해체의 순간에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독자에게 조용히 묻는다.

죄란 무엇인가?

벌은 누구에게 내려지는가?

법이 정한 형벌보다

양심의 고통이 더 무섭고 더 치유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꾸준히 증명한다.


우리는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른 뒤

죄책감을 피하거나 눌러 막으려 한다.

하지만 때때로 그 감정이 우리를 다시 인간의 자리로 데려오는 유일한 매개가 된다.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복귀다.

죄책감은 인간을 무너뜨리고

그러나 바로 균열을 통해

다시 빛이 들어온다.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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