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를 발명한 인류
- 인간은 언제부터 세기(數記)를 시작했는가
문명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도시, 문자, 도구다. 하지만 문명의 가장 깊은 바닥에는 언제나 숫자를 세는 행위가 있었다. 곡식이 몇 자루 남았는지, 계절이 언제 돌아오는지, 사람은 몇 명인지. 이런 단순한 질문들을 기록하려는 욕망이 인류를 문명으로 이끌었다.
숫자는 처음부터 수학 공식이 아니었다. 숫자는 살아남기 위한 기억의 도구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언어였다. 손가락을 꺾어 만들던 원시적 셈법에서 시작해
달의 주기를 따라 만든 29.5일의 달력, 태양을 따라 365일을 세기 시작한 순간까지 숫자는 자연의 흐름을 인간의 삶 안으로 끌어오는 기술이었다.
문명은 곧 세기(數記)의 역사다. 사람들은 숫자를 통해 예측하고, 통제하고, 조직했다. 농경의 시간표가 만들어졌고 왕국의 세금이 정해졌으며 신화 속 질서가 수의 형태로 나타났다. 숫자는 인간의 공포를 줄였고 질서를 만들었으며 혼돈을 이해 가능한 세계로 바꾸었다.
1부는 인간이 어떻게 숫자를 발명하고, 어떻게 숫자가 문명의 구조가 되었는지를 따라간다. 0이라는 상상력의 탄생에서부터 12와 7이 가진 신화적 질서, 365일을 기준으로 세계를 묶은 시간표까지. 숫자는 기록의 도구를 넘어 문명을 설계하는 보이지 않는 설계도였음을 보여줄 것이다.
-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무언가’로 만든 사건
숫자 0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없음’을 표시할 방법을 몰랐다. 곡식이 없을 때도, 병사가 없을 때도 기록에서는 빈칸이었다. 빈칸이야말로 혼란의 시작이었다. "아무것도 없음’을 ‘기록할 수 없음’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류가 0을 발명했다는 것은 부재(不在)를 하나의 정보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없다는 사실도 세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라는 깨달음. 이런 인식이 수학을 바꿨고, 철학을 흔들었으며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다시 그렸다.
0이 발견되기 전의 세계는 늘 ‘무언가가 있다’는 전제를 깔았다. 하지만 세상이란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질서는 빈 공간을 정의하는 데서 시작된다.
인도 수학자들이 처음으로 ‘0’을 하나의 기호로 세우며
“아무것도 없음도 하나의 값(Value)이다”라고 선언한 순간
인류는 비로소 부재를 사유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0은 숫자가 아니라 생각의 혁명이었다.
0이 있기에 10진법이 완성되었고
0이 있기에 과학은 더 큰 수, 더 작은 수를 다룰 수 있었으며
0이 있기에 인간은 ‘유한과 무한’을 구분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더하려고 애쓰던 인간이
처음으로 없음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한 순간.
숫자의 역사 속에서 0은 가장 비어 있으면서도
가장 충만한 개념이다.
문명은 ‘비어 있음’을 표현하는 작은 원(○)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건너갔다.
Hen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