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이라는 이름의 고독
윤홍길은 도시 변두리의 어두운 삶을 정적 문장 속에 담아내며 인간의 존엄이 가장 낮은 곳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다시 일어서는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작가다.
그의 문장은 화려하지 않지만 삶의 바닥을 오래 응시한 사람만이 얻는 침잠의 결이 있다. 그는 늘 ‘인간이란 무엇으로 버티는가’라는 질문을 소설 속에서 묵묵히 되뇌며 그런 질문의 흔적이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정서적으로 묶어준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그런 질문에 대한 한 편의 대답처럼 읽힌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사내가 정리해고와 생활고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과정은 거대한 비극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현실의 단면이다.
그가 남긴 것은 재산도 유산도 아닌 닳아빠진 아홉 켤레의 구두뿐이다. 소설은 이 사내의 생을 경건할 만큼 조용하게 따라가며 한 인간의 노동과 시간 그리고 그 뒤에 남은 자취를 차분히 비춘다. 구두는 그가 걸어온 생의 거리였고 그가 감당해야 했던 책임의 무게였으며 끝내 말로 설명되지 못했던 고독의 형태였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우리는 한 인간의 비극적 빈곤보다 그의 일상을 지탱하던 책임감에 깊이 마음이 머문다. 그는 가족을 위해 더 좋은 신발 하나 사지 못하면서도 매일 새벽어둠을 뚫고 출근길을 걸었다.
소설은 그의 발바닥에 스민 삶의 온도를 낮게 깔아놓고, 독자로 하여금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의 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윤홍길은 인물의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사건을 드라마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간결한 표현 속에 더 큰 울림을 숨겨두며 독자가 그런 침묵 속에서 의미를 스스로 길어 올리게 한다.
이 작품이 던지는 교훈을 하나의 키워드로 압축한다면 책임 그리고 책임이 가져오는 고독의 존엄이다.
책임이란 거창한 의무가 아니라 하루를 버티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몫을 해내는 태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소설은 말없이 보여준다.
사내의 아홉 켤레 구두는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붙들기 위해 기꺼이 감당했던 무게의 증거다. 우리는 그의 생을 애도하면서도 그가 남긴 단단한 윤리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게 된다.
문학은 흔히 삶을 설명하려 하지만 이 작품은 설명 대신 응시를 택한다. 사내가 남긴 구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한 인간의 생애를 더듬을 수 있고 누군가의 책임이 얼마나 많은 침묵을 품고 있는지를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작고 미약한 존재들의 삶에 대해 다시 감각하도록 만들고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인간적 연대를 천천히 되새기게 한다.
책임은 고독하지만 고독이 때로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증명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은은하게 말해준다.
Hen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