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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년이 온다〉

기억의 용기가 우리를 구원할 때

by Henry




어떤 침묵은 소리보다 더 크게 울린다. <소년이 온다>의 세계는 잿빛으로 흔들리지만 그 안에서 한강은 끝내 꺾이지 않는 인간의 존엄을 더듬듯 밝혀낸다.


아픈 시대는 늘 누군가의 몸을 지나가며 기록되고 우리는 그런 기록 앞에서 늦게라도 배우고 다시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


한강은 폭력의 흔적과 인간의 연약함을 미세한 결로 포착하는 작가다. 그는 사건을 설명하기보다 상처가 남긴 결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서사를 움직이고, 말보다 숨결이 먼저 흔들리게 한다.


차갑게 느껴지는 문장 아래에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작가의 단단한 신념이 뜨겁게 응고되어 있다. 이런 집요한 탐색이 한강 문학의 뿌리를 이루고, <소년이 온다>는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단단한지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1980년 광주의 이름 없는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지만 누구도 영웅으로 세우지 않는다. 대신 부서진 몸, 뒤틀린 공포, 말할 수 없던 죄책감을 조용히 불러내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묵묵히 비춘다.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소년은 거창한 상징이 아니다. 그는 나보다 먼저 쓰러진 사람을 부축하려 했던 한 인간의 손길을 대표하며, 그런 단순한 손길이 어떻게 기억되고 왜 오늘의 우리가 끝내 외면할 수 없는 윤리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폭력을 재현하는 대신 기억의 윤리를 묻는 이 작품은 왜 기억하는 일이 중요한지 끝내 되묻는다. 그것은 고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책임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품은 성찰의 키워드를 하나로 압축한다면 ‘기억의 용기’다. 기억하는 것은 과거에 머무르는 일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내가 서 있는 자리의 윤리를 다시 묻는 행위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을 외면하려 하지만 피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림자처럼 따라오며 결국 어떤 순간에는 더 큰 용기를 내도록 요구한다. 이런 기억의 윤리는 일상에서도 멀리 있지 않다. 우리는 잊고 싶은 사람의 말에도 잠시 귀를 기울이고 불편한 역사나 사회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고통당한 사람의 경험을 가볍게 소비하지 않는 작은 선택들로 윤리를 실천할 수 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구에게 어떤 흔적으로 남을지 한 번 더 생각하는 일. 기억은 기록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결심으로 완성된다.


<소년이 온다>는 시대의 상처를 꺼내 보여주지만, 끝에 남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여전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희망, 서로를 기억하고 응시하는 용기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며 고통마저도 누군가의 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문학은 언제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돌아봄의 순간마다 우리는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더 나은 인간이 된다.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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