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조용히 사라졌거나 잊힌 말과 사랑의 몸짓

꿀벌처럼 사랑은 언제나 오래 머뭇거리며 붕붕거리지만.

by 김민율

오래전 조용히 사라졌거나 잊힌 말과 사랑의 몸짓





1959년 피에트로 제르미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형사의 주제곡 Sinno me moro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는 밤이었다. 여가수 알리다 켈리가 부르는 고요하고 깊은 슬픔과 애절함이 배어 나오는 노래가 끝나고 나서도, 그 처연한 멜로디와 절절한 가삿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Amore amore amore amore mio.

사람에게서 영원히 사라지지도 잊히지도 않아야 할 단어는 사랑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쥐고 갈 유일한 아름다움이면서, 때로는 생살 찢는 아픔이고 기다림이고 슬픔이며 희망이고 기쁨인 그 찬란함. 누군가에게는 말 못 할 삶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처럼 믿어야 할 것은 사랑이라는 것. 자기 사랑이든. 타인에 대한 사랑이든. 삶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 다른 이름의 단어 amore! 첫마디에서 마지막 마디까지 이 생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아픔을 변주하는 영혼의 단어가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오래전 조용히 사라졌거나 잊히기도 했지만, 늙어가는 누군가의 가슴에는 영원히 잊히지 않고 나비처럼 사뿐히 내려앉아 저녁노을을 바라보다 문득, 흥얼거리게 되는 단어다.

오래전에 내게서 익숙한 단어들이 사라졌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익힌 사투리들. 나의 삶이었고, 마을 사람들의 삶이었던. 외지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했던 말들. 마을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흔하게 쓰이지 않았다. 사투리에는 그런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단어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 적 언어를 여전히 쓰고 살았다. 엄마는 도시락을 싸주면서 도시락을 놓고 갈라치면 벤또 가져가라고 일렀다. 옆집 담뱃집 아저씨가 리어카를 끌고 염소 먹일 풀을 실어 나르러 가면, 마을 사람은 구르마 끌고 어데 가냐고 물었다. 그러면 담뱃집 아저씨는 꼴 베러 간다고 했다. 내가 엄마 슬리퍼를 끌고 다니면 쓰레빠 끌고 다니지 말라고 엄마는 말했다. 어느 봄날에는 아버지가 지붕에 올라가 페인트 칠을 하고 있는 모습을 올려다보다가, 엄마가 아빠 어디 갔냐고 물으면, 나는 지붕에서 뺑끼 칠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뺑끼라고 줄곧 말해 와서였다.

식민지 잔재 언어는 마을 아이들에게로 대물림되었다.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학교에 온 아이에게 아이들은 삐까뻔쩍하다고 말했다. 삐까뻔쩍은 반짝반짝하다는 뜻인 일본어 삐까삐까와 우리말 번쩍번쩍하다는 말이 합쳐진 단어였는데, 근본 없는 단어를 우리는 우리말인 줄 알고 아무 때나 썼다.


마을 아이들은 표준어와 사투리와 일본어의 경계가 사라진 언어 속에서 살았다. 엄마가 양파를 깔 때 다마네기 깐다고 하면 나는 양파를 다마네기라고 말했고, 아버지가 양동이에 물을 받으려고 바께스 가져 오라고 하면 나는 바께스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마을 사람들은 빨간 약을 아까쟁끼라고 불렀다. 어느 날 내가 벌레에 다리를 물려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서랍에서 빨간약을 꺼내며 아까쟁끼 좀 발라 놓자고 했다. 엄마가 빨간 약을 아까쟁끼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에게도 빨간약은 아까쟁끼였다. 우리의 언어는 식민 제국에 종속되었던 시절의 언어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다른 세계의 언어에 대한 호기심이 짙어졌는데, 어느 날 몇십 년 전 죽은 시인의 모습과 시어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방과 후, 가끔 나는 학교 근처 일제 강점기 때 저항 시인이었던 김동명 시인의 시비 근처에서 놀았다. 거대한 돌로 만들어 세워진 시비 앞에 서서 올려다보곤 했는데, 시비 아래에는 시인의 초상화가 부조되어 있었고, 양옆에는 시인의 시 내 마음과 파초가 돌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가만히 시인의 초상화를 들여다보다가 내 마음이라는 시에 시선이 닿아 조용히 읽어내려갔다. 파초도 오른쪽 시비에 새겨져 있었는데, 파초는 후에 시인의 제자가 작곡하여 가곡으로도 널리 불렸다고 한다. 학교 선생님들은 가끔 그곳에서 교내 백일장을 시행했다. 아이들은 시비를 중심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동시를 쓰거나 산문을 썼다.

시인의 생가가 건너 마을 어디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라진 시인이었지만 일제 강점기 때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절필했던 시인의 자취를, 그가 남기고 간 언어의 흔적을, 언젠가는 찾아가 보리라 다짐한 적이 있다.


이 세상에 온 어떤 시적인 사람들은 시적 영혼이 창조해 낸 언어로 춤을 추었고, 꿀벌들은 뒷마당 벌통에 모여 그들만의 언어로 춤을 추었다. 아버지는 꿀벌을 키웠다. 벌통에 꿀벌들이 떼로 몰려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뒷마당은 위험하고 금지된 곳이었다. 마을 아이들과 숨바꼭질이라도 하게 되는 날이면 엄마는 나에게 벌에 쏘이니 뒷마당에 가서 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도 나는 자꾸만 꿀벌들이 생각나 살그머니 뒷마당으로 나가 보곤 했다. 꿀벌들이 붕붕거리며 벌통 주위에서 날아다니거나 벌집에 떼로 붙어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하고 있었지만, 언제 꿀벌들에 쏘일 줄 몰라 겁이 나기도 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자 꿀벌들이 붕붕거리는 소리가 귓속에 가득 차 내 몸이 붕붕거리는 것만 같았다.

먼 곳에서 돌아온 꿀벌은 벌집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중간에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8 자 모양의 춤의 각도와 길이를 통해 밀원이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어디에 꿀이 있는 꽃들이 있는지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춤은 질서 정연하고 정확한 언어의 몸짓이다.

그들은 아기 꿀벌에게 춤을 가르쳤고,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로 8 자 춤을 전수한다. 꿀벌 연구자들은 아기 꿀벌들이 어느 정도 시기가 되면 8 자 춤을 추긴 하지만, 어느 정도 경험 있고 늙은 벌이 춤추는 것을 본 후에야 첫 춤을 시도한다고 했다. 어린 벌들도 인간처럼 사회적 학습으로 자신들만의 소통의 언어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었는데, 보고 배우지 못한 꿀벌들은 1~2주 사이에 본능적으로 8 자 춤을 추긴 했지만 무질서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린 꿀벌들처럼 엄마와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의 삶과 언어 속에서 말의 풍습을 익혔다. 지금은 그때 그 시절의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내 언어는 표준어에 가깝다. 가끔 표준어를 쓰는 서울 태생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강원도 사투리나 억양이 불쑥, 튀어나와 내가 나를 어색해하기도, 놀라기도,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표준어에 익숙한 삶이 편해졌다.


말들이 뒤죽박죽 된 세상이다. 사람들 틈새에 앉아 있으면, 전라도 사투리인가 경상도 사투리인가 모호한 말들이 서울말과 뒤섞였다. 이제 강원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 나는 그 말들의 틈새를 비집고 앉아 조용히 사라지거나 잊힌 말 같을 때가 있었다. 누군가는 어른이 되어 장수말벌처럼 독침을 쏘아 타인의 영혼을 죽이는 언어로 우화 했고, 누군가는 꿀벌이나 송곳벌처럼 독침 없는 사랑의 언어로 우화 했다.

잘 지냈어요? 아픈 데는 좀 괜찮아요? 버찌가 익어가는 무렵, 문득 나의 안부를 물어오는 한 사람의 말은 부드럽고 친절하고 편안하고 고마웠다. 괜찮아. 충분히 너는 잘 살고 있고, 잘하고 있어. 부족한 내가 내게 친절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랑의 언어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도 고마웠다. 그러니 말의 근본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함을 잊지 않으리라. 내 생의 필수 목록 중 첫 번째가 되어야 하리라는 것도.

꿀벌들은 지키고자 하는 게 있어 그토록 부지런히 일한다. 사랑하는 자기 종을 살리기 위한 열심으로 붕붕거리며 수천 번 수만 번 날갯짓을 하는 것이다. 봄이나 여름에 태어난 일벌들은 꿀과 꽃가루를 모으느라 한 달 밖에 살지 못하고 죽음에도 꽃가루받이를 책임지고 부지런히 일한다.

꿀벌의 운명처럼 나는 그 무엇을 책임지고 부지런히 사랑한 적 있었을까. 추운 겨울,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의 둥지라도 지어 주었을까. 부족한 말은 사랑에 닿지 못하고, 뾰족한 침으로 찔러 어떤 영혼을 오래 아프게 한다. 결국엔 모두가 사랑이라고 몸짓으로라도 말해야 제대로 살 수 있는 운명이다. 사랑이라고 말로는 하기 어려워서 주위를 맴돌기만 하는 꿀벌처럼 사랑은 언제나 오래 머뭇거리며 붕붕거리지만.


삶을, 곁의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것, 많은 단어들이 필요하지 않다. 살았고, 살고 있고, 살아야 할 어떤 투박하거나 세련된 단어들이 어느 날엔가 문득 사라지고 잊히더라도, 사랑이라는 잊히지 않을 단어 하나면 충분하다.

미처 말로 할 수 없더라도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며 본질적인 사랑의 몸짓이 가장 아름다운 언어의 풍습이 되기도 하는 것. 50년을 함께 살면서 서로의 투박한 사투리에 익숙해진 농부 부부의 사랑이 그랬다. 아내가 이웃 사람과 걷기 운동을 갔다 온 사이 남편이 연필을 깎아 아내가 공부하는 교자상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그게 남편이 아내에게 표현하는 작은 사랑의 몸짓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말로 표현을 하지 않아 소통 부재로 인해 가끔 사랑 없음에 대한 오해를 하고 서운해하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와 연필을 깎아 가지런히 놓아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진정성과 깊은 의미를 알게 되는 때가 조금 이른 스무 해 겨울이거나 서른 즈음의 봄, 마흔 즈음의 여름이거나 그보다 더 늦은 때일 수도 있겠지. 살면서 영영 모른 채, 저물어 가는 빛 속에서 마지막 오분을 남겨두고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외로운 누군가도 있겠지.

회복기에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자두를 깨물어 먹는 어느 눈부신 여름날 오후. 사람이 일생동안 깨달아야 할 진리는 사랑이라는 한 단어에 압축되어 있음을. 우매한 사람은 몸도 마음도 많이 아프고 나서야 창밖의 고요한 풍경을 바라보며 뒤늦게 알게 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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