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한 어른의 취미
갈등을 견디지 못하는 나는 어느새부턴가 드라마를 잘 못 본다. 책을 읽을 때도 위기상황이 등장하면 제발 해피앤딩이기를 바라며 갈등이 풀릴 기미가 보일 때까지 엄청 빨리 읽는다. 얼른 편안한 상황의 페이지로 도달하길 간절히 바라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매 시즌과 영화까지 챙겨보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바로 ‘귀멸의 칼날‘이다.
귀멸의 칼날은 자타공인 너무나도 유명한 애니매니션이다. 눈 깜박일 새도 주지 않는 화려한 액션과 뚜렷한 권선징악, 그리고 유치하지만 울지 않을 수 없는 순애보까지. 나에겐 거의 완벽한 애니메이션이다.
가슴 아픈 것들을 잘 견디지 못하는 내가 갈등과 슬픔의 결정체인 귀멸의 칼날은 즐겁게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등장인물들이 정말 귀엽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주인공의 동그란 두 눈이 깜빡이는 것을 보면 그 깜찍함에 빠져버려 상황들이 견딜만하다.
그리고 악당들은 결국엔 처단당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해피앤딩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바로 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참고 보는 이유일 것이다.
추운 겨울, 아이들을 데리고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우리 부부는 대형 쇼핑몰에 자주 간다. 말로는 아이들을 위한 거라 하지만 사실 우리의 속내는 따로 있다.
바로 가챠 코너 가기다. 가챠는 뽑기인데 한국 사람들도 뽑기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듯하다. 거짓말 조금 보태 운동장만 한 크기의 공간에 세상의 모든 가챠 기계들이 빼곡히 모여있다.
우리 네 명은 가챠샵에 들어가기 전 서로의 손을 잡고 약속한다.
“그 무엇이 나오더라도 하나씩만 뽑겠습니다. “
그러고 나서는 두 명씩 짝을 지어 꽤 진지한 눈빛으로 뽑을 기계를 찬찬히 찾아본다.
이럴 수가! 귀멸의 칼날 가챠가 있다. 귀멸의 칼날 가챠는 정말 찾기 어렵다. 남편은 귀멸의 칼날 라이선스가 너무 비싸 쉽게 들여오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 귀한 가챠가 내 눈앞에 있었다.
아이들에게 “엄마 먼저 뽑아볼게! 하고는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한다.(어느 신께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리고 결제를 하고 버튼을 누른다.
또르륵 떨어진 동그란 가챠공 안에는 바로 내가 기대했던 그 친구가 들어있다. 신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나 보다. 기분이 너무 좋아 얼굴이 빨개지고 목소리가 커진다.
“아빠, 엄마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졌어? “ 어리둥절한 아이의 질문에 얼른 마음을 진정시킨다.
기분 좋게 모두 하나씩 뽑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에이터 아래 구석에 귀멸의 칼날 가챠가 또 있다! 정말 말도 안 된다. 그렇게 구하기 힘들었던 그 가챠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영원한 내편(?)인 남편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하나 더 뽑을래? “ 물어본다.
아이들의 눈치가 살짝 보인다. 우리는 하나씩만 뽑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흥분한 모습이 흥미로운 아이들은 한 개 더 뽑은 엄마를 착하게도 모른척해준다.
두 번째 가챠도 또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나왔다. 올해부터 귀멸의 칼날의 라이선스가 조금 저렴해진 건가..? 이 작은 캐릭터들이 뭐라고 나는 아주 신이 났다.
오늘도 너무 추운 날인데 갈 곳은 결국 대형 쇼핑몰뿐인 것 같다. 쇼핑몰 가서 가챠 하나씩만 뽑자고 가족들에게 먼저 말해볼까. 이번엔 진짜 꼭 한 번만 뽑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