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어] 기다려(아이에게는 믿음, 어른에게는 조급함)
제2장 아이가 찍어주는 점(기다려)
[오늘의 단어] 기다려(아이에게는 믿음, 어른에게는 조급함)
아이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엄마, 기다려.”
처음엔 조금 웃겼다.
보통은 내가 아이에게 “기다려”라고 말해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엄마 이것만 하고.”
“지금은 안 돼, 잠깐만 기다려줘.”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이가 먼저 “기다려”를 말하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내 손을 보며, 내가 신발끈을 묶는 사이, 문을 열기 전 숨을 고르는 순간마다.
“엄마, 기다려. 나도 같이 할래.”
아이에게 ‘기다려’는 시간을 늘리기 위한 말이라기보다 함께 하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혼자 먼저 가는 게 아니라 같이 가고 싶어서. 좋은 것들을 놓치기 싫어서.
아이의 “기다려”에는 대개 다음 문장이 숨어 있다.
“나도 여기 있어.”
“나도 같이 하고 싶어.”
“나 빼고 시작하지 마.”
그 말은 떼쓰는 소리 같으면서도 사실은 관계를 확인하는 것 처럼 들린다.
반대로, 어른에게 ‘기다려’는 조금 다르게 들린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다린다. 답장, 승인, 일정 확정, 결과, 회신.
“확인 부탁드립니다” 뒤에 이어지는 기다림.
“혹시 가능하세요?”를 보내놓고 맞이하는 기다림.
문제는, 어른의 기다림은 대개 시간을 쉬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생각하고, 가늠하고, 대비한다.
‘혹시 못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이 방향이 틀리면 어떡하지?’
‘내가 너무 성급해 보이진 않았나?’
몸은 앉아 있는데 마음은 늘 뛰어다닌다. 어른의 기다림에는 믿음보다 조급함이 더 많이 섞인다.
아이의 기다림이 다정한 이유는, 그 기다림이 비교적 ‘가벼워서’가 아니라 그 기다림이 비교적 ‘믿음으로 되어 있어서’인 것 같다. 아이는 기다리면서도 세상을 무너지게 만들지 않는다.
기다리다가도 다른 놀이를 찾아내고, 기다리는 동안 노래를 부르고, 그 시간에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끝내 내가 올 거라는 걸 믿는 눈이다.
“엄마는 결국 나한테 올 거야.”
그 믿음이 아이 스스로의 기다림을 버티게 한다.
나는 가끔 아이의 그 눈을 부러워한다.
어른이 된 우리는 기다림 앞에서 쉽게 불안해진다.
연락이 늦으면 마음이 먼저 결론을 내리고, 대답이 애매하면 자꾸 의미를 덧붙이고, 결과가 늦어지면 나 혼자 최악의 장면을 예습해 버린다.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쉬는 시간으로 쓰지 못하고 불안의 시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데 너무 익숙하다.
그래서 요즘은, 아이의 “기다려”를 들을 때마다 나에게도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나는 지금 무엇을 믿지 못해서 이렇게 조급할까.”
상대의 답을? 상황의 흐름을? 아니면, 나 자신을?
어쩌면 어른의 기다림이 힘든 이유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이에 나를 믿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아마 오늘 당신도 어떤 기다림 하나를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마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 기다림이 당신을 잠식하고 있다면, 오늘은 아이처럼, 기다림에 작은 행동을 하나 얹어 보면 좋겠다.
기다리는 동안 나를 조금 돌보는 일.
물을 한 잔 더 마시는 것, 창밖을 한 번 보는 것, 짧게라도 몸을 펴는 것.
기다림을 불안으로 채우는 대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으로 채워 보는 것.
나는 오늘의 단어를 이렇게 적어 두고 싶다.
기다려.
아이에게는 “같이 가자”라는 말이고, 어른에게는 “불안해하지 말자”라는 연습이 되는 말.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것들이
결국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갈 거라는 믿음을 조금만이라도 되찾을 수 있다면,
기다림은 더 이상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하루를 망치지 않게 하는 숨 고르기가 될지도 모른다.
믿음이 아주 조금만 돌아오면, 기다림은 숨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