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가 내 일입니다"

건강한 경계가 있는 조직의 조건

스물한 번째 이야기

<“여기까지가 내 일입니다”>

- 건강한 경계가 있는 조직의 조건


역할이 뒤섞일 때 먼저 무너지는 것은 일의 효율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다.


1) 이상한 지시가 시작되는 지점

어느 회사에서의 일이다. 어느 날 재무 담당 임원이 이렇게 말했다.

“올해 인센티브 기준, 인사에서 설계하세요.

영업이익 몇 퍼센트에서 얼마를 떼어낼지, 구간별로 시뮬레이션도 다 해서요.”


겉으로 들으면 자연스럽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전제가 빠져 있었다.


올해 회사의 목표 영업이익은 얼마인지,

매출·비용 시나리오는 어떻게 가정하고 있는지,

인센티브로 쓸 수 있는 재원 한도는 얼마인지.


어떤 숫자도 공유되지 않은 채

“재원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구조부터 짜달라”는 주문만 반복되었다.


재무가 해야 할 ‘재원 확보’는 비워 둔 채, HR에게 ‘배분 기준’만 먼저 설계하라고 요구하는 모양새였다.

그 순간 마음속에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이건… 아직 우리 일이 아니다. 재무의 일이 끝나야 비로소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2) 역할 경계가 흐려질 때 생기는 세 가지 신호

조직에서 역할 경계가 무너지면, 겉으로는 “서로 돕는 협업”처럼 보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다른 신호가 먼저 나타난다.


첫째, 중요한 일이 밀린다.

HR은 인력계획, 평가·보상, 조직문화, 리스크 관리 같은 핵심 과제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ESG 홍보용 자료, 그룹 보고용 이미지 작업, ‘좋아 보이는’ 대외 활동에 계속 끌려가다 보면 정작 안에서 조직을 지탱하는 일은 자꾸 뒤로 밀린다.


둘째, 책임은 흐려지고, 피로는 쌓인다.

재무가 해야 할 일, 인사가 해야 할 일, 각 직무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 명확하지 않으면,

결과가 좋을 때는 “다 같이 잘한 것”이 되고

결과가 나쁠 때는 “각자 책임져야 할 것”이 된다.

성과는 공용이지만, 실패는 개인화되는 구조.

이 구조에서 가장 많이 지치는 건 중간에서 온몸으로 버티는 실무자들이다.


셋째, 사람들은 점점 ‘내 일’을 말하지 않게 된다.

“이건 원래 누구 일이었지?”

“왜 이걸 우리가 하고 있지?”


이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이미 조직 안의 신뢰는 조금씩 금이 가고 있는 것이다.

연구들에서도 역할 모호성과 역할 과부하가 직무 스트레스와 번아웃, 이직 의도와 연결된다는 결과들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우리는 현장에서 그 숫자를 매일 몸으로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3) 제도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역할의 문장’

조직에서 경계는 ‘벽’이 아니라 문장이다.

“재무는 영업이익과 재원 구성을 책임진다.”

“인사는 확보된 재원을 어떤 기준과 원칙으로 나눌지 설계한다.”

이 문장이 존재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을 알고, 타인의 역할을 존중할 수 있다.

제도와 프로세스는 이 문장을 뒷받침하는 도구일 뿐이다.

문장이 없는데 제도만 만들면, 결국 누군가의 책상 위에만 존재하는 문서가 된다.


경계가 있다는 것은 “여기까지가 내 일입니다”를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차가운 선긋기가 아니라, 책임의 범위를 분명히 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4) 보이기식의 대외홍보에 밀려난 ‘정말 중요한 일’들

한동안 인사팀은 중요한 프로젝트 하나를 충분히 붙잡지 못했다.

고용브랜드 개선

제도개편

인원관리

조직문화 진단과 결과에 대한 후속작업

이 모든 것들을 정리해야 할 시기에 우리는 대외 홍보자료, 그룹 보고용 스토리, ‘책임자가 잘 이끌고 있는 회사’ 이미지를 강화하는 일들을 병행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일만 하다 보면 “좋게 보이는 회사”를 만들다

“실제로 좋은 회사가 되는 것”은 놓치게 된다.


회사 밖에서는 “좋은 제도를 갖춘 기업”으로 소개되지만, 정작 회사 안에서는

인센티브 구조가 모호하고,

평가가 공정하지 않다는 말이 돌고,

사람들은 점점 말을 아끼게 된다.

좋은 조직은 대외 보고서보다 먼저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들여다본다.


5) “여기까지가 내 일입니다”라고 말하는 용기

조직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가 재무의 일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인사의 일입니다.”


“이 부분은 지금 우리가 돕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해당 조직이 책임져야 합니다.”

이 말은 이기적인 게 아니라, 조직을 오래 가게 만드는 문장이다.


역할 경계가 분명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더 잘할 수 있고, 서로에게 기대할 수 있고, 도움의 손길도 더 자연스럽게 오고 간다.

경계가 무너지면 모두가 조금씩 모든 일을 하다가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된다.



“여기까지가 내 일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에게 온전히 기대며 함께 오래 일할 수 있다.



#조직문화 #회사생활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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