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기지를 지키고, 아빠는 하늘을 연다
그날 저녁도 패턴은 비슷했다.
이유식 먹이고, 옷에 묻은 걸 닦아내고, 바닥에 떨어진 쌀알을 발가락으로 피해 가면서 싱크대 앞에 섰다.
뒤에서는 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아아—!”
나는 고무장갑 낀 손을 설거지물에 담근 채, 대답만 질질 끌었다.
“엄마 설거지 다~ 해가네에에~ 조금만 기다려어어~”
사실 다 해가는 건 아니었다.
그냥 오늘 하루도 어떻게든 다 지나가기를, 나도 얼른 소파에 좀 눕고 싶다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책 읽고, 놀아주고, 밥 먹이고, 씻기고, 낮잠 재우는 루틴.
별일 없이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다행이라며, 마음속 체크리스트에 작은 표시 하나만 조용히 그어 두는 정도의 마음.
그때, 현관 도어록에서 삐-익 소리가 났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왔다.’
그다음 순간, 나보다 더 빨리 반응한 작은 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채아의 귀가 쫑 하고 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대책 없이 소리를 지르던 애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펜스를 짚고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똑바로 바라봤다.
발뒤꿈치가 살짝 들리고, 숨소리가 반 박자 빨라졌다.
아, 기다리고 있었구나.
나만 어른처럼 시계를 보면서 퇴근 시간을 세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작은 우주인도 자기 방식대로 하루의 마지막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복도를 타고 목소리가 들어왔다.
“채아야아~ 까──꿍!”
그 한 마디에 채아 얼굴이 터졌다.
입이 얼굴만큼 커지도록 활짝 벌어지고, 눈이 반달처럼 접히고, 두 발로 펜스를 꾹꾹 밟으면서 온몸으로 반가움을 흔들었다.
꽤 많이 큰 것 같은데, 아직도 “까꿍” 한 마디에 이렇게 세상이 끝까지 환해진다.
아기는 계산이 없어서, 저 반가움이 더 순수해 보였다.
그 마음이 너무 예뻐서, 설거지로 쌓였던 피곤이 잠깐 뒤로 밀렸다.
나는 고무장갑을 벗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눈앞에는, 하루 종일 내 팔에 안겨 있던 애가
이제는 두 발로 서서 다른 사람을 향해 웃고 있는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안심이 먼저 올라왔다.
‘다행이다. 나 말고도 이 아이를 저렇게 웃게 해 줄 사람이 있다.’
그다음엔, 아주 얇게 서운함이 따라왔다.
‘오늘 하루 종일 매달린 건 나였는데,
이 집 하이라이트는 저 사람이네.’
그래서 마음속에 작은 팻말 하나를 세워뒀다.
‘엄마는 지금 잠시 부재중입니다. 용무는 나중에…’
둘이 “까꿍!”, “꺄아!”를 주고받는 소리를 배경음처럼 깔아 두고,
나는 허리를 등받이에 더 깊이 기대었다.
오늘 하루 처음으로,
“나 좀 쉬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진짜로 들었다.
낮의 채아는 나와 함께 조용히 책을 보고, 밥을 먹고, 낮잠을 잔다.
숟가락을 떨어뜨리면 내가 줍고,
졸리면 내가 안아서 등을 두드려 준다.
나는 이 집 바닥을 닦고, 벽을 세우고, 공기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사람이다.
저녁이 되면, 이 집 천장이 열린다.
아빠가 들어오면 채아의 볼륨은 두 칸쯤 올라가고,
우리 집은 갑자기 작은 놀이터가 된다.
나와 있을 때의 채아는 고요하게 도는 작은 위성 같고,
아빠가 오면 그 위성이 불꽃놀이처럼 반짝이기 시작한다.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이고,
아빠는 하루 종일 기다릴 만큼 가장 재밌는 사람.
그 사실이 조금 서운하고, 많이 고맙다.
아빠를 기다리며 귀를 쫑 세우고 서 있던 그 순간의 채아는
아기 우주인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꼬리를 대신 두 발로 흔들며 자기 별을 향해 서 있는 아기 강아지 같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던 나는
오늘도, 그 우주인이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도록
기지를 지키고 있는, 조금 지친 북극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