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내리는 눈이 무에 그리 새로울까 싶다가도,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나이와 상관없이 마음에 잔잔한 파동이 일곤 합니다.
매일 아침 출근길이 전쟁 같았던 시절에는 저녁 뉴스에 눈 예보만 떠도 잠을 설치며 걱정하느라, 눈은 제게 반가움보다는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서두를 것도, 치열할 것도 없는 여유를 가진 '젊은 노인'이 되다 보니, 올해 내린 첫눈에는 동공을 크게 키우고 "어머~" 하는 예쁜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까지 찍게 되더군요.
문득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 미국 최남부에 있는 아들이 생각났습니다. 베란다에서 찍은 눈 사진을 카톡으로 보냈더니 금세 답장이 왔습니다. 마침 추수감사절 주간이라 달콤한 휴식을 즐기던 터라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일까요. 강원도 인제에서 군 복무 하던 시절에는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눈이, 미국에 오니 이토록 그리울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혹한기 훈련과 행군을 하며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을 헤치던 그 고단함조차 그리움이 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당시의 힘들었던 디테일들은 잊고, 그 경험이 내게 남긴 의미에 따라 긍정적인 부분만 기억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사실 제 아들은 아파트에서만 자라며 공부 이외에는 별다른 노동을 해본 적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군대에서 처음으로 눈을 쓸어보고 혹독한 추위를 견뎠을 텐데, 그 고생스러웠던 시간조차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다는 사실에 엄마로서 대견함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교차했습니다.
엄마가 보내준 눈 사진을 보며 아들은 청춘의 한 자락을 함께 고생했던 전우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입대할 땐 미소년 같았던 자신들이, 손바닥에 굳은살 몇 군데는 훈장처럼 박힌 강한 남자가 되었다는 자부심도 느꼈겠지요. 더 멀리는 눈썰매를 타고 눈사람을 만들며 놀던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 (퀼트와 프랑스자수의 스킬을 혼합한, 쥬흐모던 기법으로 내가 만든 '겨울풍경' 벽걸이): "청춘의 한 철, 무릎까지 차오르던 강원도의 거친 눈발은 이제 아들의 마음속에 단단하고 아름다운 추억의 무늬로 남았습니다."
아들이 이제야 제법 인생의 깊이를 알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힘들었던 과거도 시간이 지나면 그 속에서의 배움을 통해 자신을 더 성장시킨다는 것! 지금 마주한 치열한 삶의 순간들도 잘 이겨내어 더 단단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가길 바랍니다. 그리고 훗날 그 추억 상자에서 오늘의 시간들을 하나씩 꺼내보며 그리워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치, 오늘, 눈 오는 날에 강원도의 그 거친 눈을 아름답게 추억하듯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