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저기요. 제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일어나 보세요.”
“으으... 언니... 나 괜찮아요...”
“괜찮긴. 어서 일어나요.”
선배가 사자머리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 눈빛이 뭔가 묘했다.
네가 뭘 했는지 다 안다는 듯한...
사자머리는 마지막까지 내 어깨를 한 번 더 찍어 누르듯 기대다가 쿨하게 끌려 나갔다.
늦은 감이 있긴 했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건 그런데-
그냥 저렇게 가 버리면... 나는 어떡하라고.
사자머리는 사라졌지만 내 등에 박힌 시선들은 그대로였다.
주리도 차갑게, 아주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하아, 진짜...
억울했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다 내 쎄복인 것을.
‘그래, 다시는 보지 말자. 사바나에서 절대 기어 나오지 말아라, 제발.’
똥을 한 바가지 싸지른 사자머리는 그렇게 동아리 여자 선배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폭탄이 수거되고 나자, 뒤풀이 공기는 서서히 풀렸다.
사람들은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고, 굳어 있던 어깨들이 하나둘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오늘 진행을 맡은 남자 선배가 홀 가운데로 걸어나왔다.
“먼저 저희 합창 동아리 아름소리 오디션에 참가해 주신 신입생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짝.짝. 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바쁘신 와중에도 자리해 주신 우리 OB 선배님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번 01년도 집행부 기장을 맡은 이상혁이라고 합니다.”
와아아아~~~!
환호와 함께 더 큰 박수가 쏟아졌다.
“저희는 합창 동아리지만... 절대 노래만 하진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킥킥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술도 엄청 마시고, 여행도 다니고, 공연도 보면서 고등학생 때 못 했던 걸 다 해보는 동아리입니다. 그러니까 다들... 좋은 결과 있으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와아아아아~~~!
휘익- 휘-
“잘 생겼다, 이상혁!”
“00 학번 집행부 화이팅~!!!”
상혁 선배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럼 편하게 식사하시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아름소리 뒤풀이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잔을 머리 위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자, 아름소리 화이팅~!!”
이야아아아~~~ 화이팅~~~!!!!!
홀 전체가 함성으로 흔들렸다.
...그래. 화이팅.
근데 나는 지금, 막 즐길 때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화이팅이다!
합창 동아리 뒤풀이에서 노래가 빠질 리 없었다.
누군가 기타를 꺼냈고, 웅성거리던 홀이 자연스레 둥글게 비워졌다.
양복 차림의 OB 선배 한 분이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아름소리가 낳았다는 전설의 보컬.
직장인 밴드에서도 노래한다는 그가 마이크도 없이 무대에 섰다.
기타 줄이 한 번 울리고.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우와-
첫 소절이 터지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술기운이 걷혔다.
이게 울림이구나.
가슴 안쪽을 한 번 세게 긁고 지나가는 목소리.
여러 갈래 길 중, 만약에 이 길이 내가 걸어가고 있는~
돌아서 갈 수밖에 없는 꼬부라진 길 일지라도~
멍하니 그의 노래를 들었다.
여러 갈래 길.
꼬부라진 길...
의대를 목표로 달리다 미끄러져 들어온 공대였다.
어차피 모든 게 내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게 맞는 길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아직은.
딱딱해지는 발바닥~
걸어 걸어 걸어 가다 보면
저 넓은 꽃밭에 누워서 나 쉴 수 있겠지~
딱딱해지는 발바닥.
고등학교 때는 앞만 보고 달렸다.
대학만 가면 다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길은 더 많아졌고,
고민은 더 복잡해졌고,
꽃밭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얼마나 더 걸어야 할까.
술기운이 좀 올라서일 테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저기, 아무 말 없이 노래를 듣고 있는 그 애.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리에게 닿았다...
그래도 걷다 보면.
꽃밭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숨 고를 자리가 나오지 않을까.
와아아아~~~!!!
홀 전체가 다시 한 번 들썩였다.
엄청난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선배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역시 쿨해, 멋져.
다시 진행을 보기 위해 상혁 선배가 중앙으로 나왔다.
“선배님 노래 잘 들었고요... 이제 신입생 여러분들 차례입니다.”
그러자 웃음이 잦아들었다.
누군가는 잔을 내려놓았고, 누군가는 괜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방금까지 들떠 있던 공기가 묘하게 조여 들었다.
상혁 선배가 씩 웃었다.
“오늘 이분 빼고는 얘기할 수 없죠. 3차 오디션 참가자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그분. 화제의 주인공! 자, 다들 누군지 아시겠죠? 유교 힙합 보이, 류성룡 참가자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순간 홀 안이 또 한 번 폭발했다.
...뭐야.
저 인간도 아직 안 갔어?
나는 아까 오디션장에서 그의 추태를 떠올렸다.
비뚤어진 모자, 골반에 걸친 바지.
체인은 여전히 번쩍거렸다.
역시나 껄렁껄렁 흐느적거리며 류성룡이 중앙으로 나왔다.
“자, 처음 보는 선배님들도 계시니까 다시 자기소개 한번 하시고, 아까 못 보여준 노래 한 곡 부탁합니다!”
상혁 선배의 장난기 어린 말.
그 순간.
류성룡이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나사 풀린 자세를 툭 털어내듯, 반듯한 차렷 자세를 취했다.
“안녕하십니까. 고구려대학교 경제학과 00학번 김성준입니다.”
...엥?
아까 선균관대 한문학과라고 하지 않았나? 웬 00학번?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헐, 그럼 설마...
그렇다.
00학번 집행부 선배였다.
긴 오디션이 지루해질 즈음.
신입생인 척 나와서 생쇼를 하고 내려가는 이벤트.
어쩐지.
정말 개또라이 같더라니.
선배는 능청스럽게 허리를 숙였고,
홀 안은 박수와 야유가 넘쳐났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신입생들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다들 웃으며 잔을 들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완전히 살아났다.
나 역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자머리도 있었고, 오해도 받았고,
여전히 김주리는 저 멀리 차갑게 앉아 있지만.
그래도 이 동아리, 나쁘지 않다.
어쩌면 이게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부라진 길이지만, 그래도 가 볼 만한.
그래.
한 번 걸어보자.
오디션 뒤풀이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