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첫 미팅 4

마무리 편

by 토박이

지하철역 입구까지 걸어오는 내내 발걸음이 유난히 느렸다.

누구 하나 서둘러 가자고 재촉하지 않았다.

다들 이 밤을 이대로 끝내긴 아직 아쉬운 듯, 말없이 걸음을 끌었다.

그렇게 도착한 지하철역 입구.

명진이가 여자애들 쪽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우린 여기서 담배 한 대 피고 갈게.”

혜림이는 여자애들끼리 잠깐 눈을 맞추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우리 먼저 들어갈게. 다들 즐거웠어. 다음에 또 보자.”

그게 뭐라고.

그 마지막 인사 한 마디가 서운하게 느껴졌다.

“그럼... 안녕.”

여자애들의 가녀린 손목이 바람에 흔들렸다.

“응, 잘 가.”

우리도 손을 들어 인사했다.

짧은 틈 사이로 말없는 눈빛들이 오갔다.

고요했지만, 분명한 속삭임이었다.

여자애들이 등을 돌려 지하철역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혜림이가 내려가기 직전, 고개를 살짝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반달처럼 휘어진 그녀의 눈.

아쉬움일까.

아니면... 정말, 그냥 인사였을까.

그녀는 그렇게 물음표를 남기고 계단 아래로 사라져갔다.



“야.”

여자애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명진이가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선민이와 진형이를 번갈아 찔러봤다.

“니네 뭐야.”

둘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했다.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제각각 흩어졌다.

“뭐가?”

“무, 무슨 소리야.”

목소리 끝이 살짝 올라갔다.

그게 영 수상쩍었다.


“키가 커서 뭐랬더라? 멀대 같댔나?”

나는 선민이 옆구리를 툭 쳤다.

“내가 그랬었나.”

녀석은 괜히 허공을 보며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근데 하는 짓이 좀 귀엽더라. 애기 같고.”

“뭐, 인마?”

어이없어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진형이 너는.”

명진이가 연기 사이로 진형이를 가리켰다.

“니네 누나 같대매? 이 새끼들 진짜 황당하네.”

“나... 연상 좋아하나봐.”

“얼씨구?”

명진이가 혀를 찼지만 진형이는 베시시 웃기만 했다.

딱히 부끄러운 기색도 없었다.


녀석들은 오늘 짝을 만난 걸까.

담배를 한 모금 쭈욱 빨았다.

구름 사이, 반달처럼 휘던 혜림이의 눈웃음이 떠올랐다.

히힛, 간지러워.

팔뚝에 닿았던 그녀의 손길.

그 따스함...

느껴진다.

그녀가 다시.

아련한... 그녀의 향기까지.

“하아...”


탁!


“드럽게 팔 냄새는 왜 맡고 있냐?”

명진이가 벌레라도 본 듯 내 팔을 찰싹 때렸다.

“흠흠... 아니, 뭐가 묻었나 해서.”

나는 괜히 팔뚝을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그러자 진형이가 내 옆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너는 마음에 드는 애 없었어?”

순간, 혜림이 이름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없어.”

짧게 잘라 말하고는 남은 담배를 깊게 빨았다.


"혜림이, 지금 잘 되고 있는 남자 있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기가 가슴 깊숙이, 묵직하게 퍼졌다.

“명진아, 근데 술값 얼마 나왔냐?”

선민이가 담배를 입에 문 채 지갑 속 돈을 세며 물었다.


“사천 원씩만 내.”

“어? 여자애들은 오천 원씩 냈잖아?”

명진이가 담배 연기를 후 내뿜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야, 거기가 원체 싸잖아. 나도 이 정도로 적게 나올 줄은 몰랐다야.”

말은 저렇게 했지만, 녀석의 평소 행태를 보면 미리 계산기를 두드렸을 게 뻔했다.

진형이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야, 아무리 그래도 좀 너무했다.”

명진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진형에게 쏘아붙였다.

“그럼 넌 오천 원 내. 븅신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형이 손에 들린 오천 원짜리를 낚아채듯 휙 빼앗았다.

“야! 아니, 왜!”

진형이가 황급히 명진의 팔에 매달렸다.

명진은 끝까지 그 손을 뿌리치며 낄낄거렸다.

결국 우리에게 사천 원씩 걷은 명진이는 흡족한 표정으로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야, 이거 좋은데.”

눈빛이 반짝였다.

마치 인류 문명사에 남을 대단한 발명이라도 해낸 사람 같았다.

이 자식은 벌써 다음 미팅에서 여자들한테 얼마를 걷을지, 그 그림부터 그리고 있었다.

참 난 놈은 난 놈이었다.


“아, 그리고 연락처는 주말에 혜림이한테 물어봐서 월요일에 알려줄게.”

그 한마디에 선민이와 진형이 얼굴에 다시 붉은 기가 돌았다.

돈 천 원 가지고 치고받던 놈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표정이 금세 말랑해졌다.

“진짜지?”

“야, 꼭 물어봐라.”

“알았으니까 그만 보채.”

나는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뭐, 다음을 기약해야지.

미팅이 이번 한 번뿐인 것도 아니니까.

우리는 담배를 끝까지 빨아 태운 뒤 각자 집으로 향했다.

우리 스무 살의 첫 미팅은 그렇게 우스꽝스럽고도 묘한 여운을 남긴 채 끝이 났다.

그리고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이 왔다.



푸하하하하.


강의실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복도 끝에서 명진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민이는 책상 앞에 털썩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넋이 나가 있었고, 명진이와 진형인

세상 재밌다는 듯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배를 잡고 있었다.


“뭔데 아침부터 이렇게 시끄러워?”

내가 다가가자 명진이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선민이를 푹 가리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 새끼 완전 개까였어. 크흐흐흐.”

“엥? 둘이 분위기 좋았잖아?”

내 말에 진형이가 웃음을 겨우 참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좋기는 개뿔. 키 작아서 싫대. 자기보다 더 작은 것 같다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민이가 벌떡 일어섰다.

“내가 더 컸다고! 그리고 병신아, 지도 까였으면서!”

선민이가 진형이를 노려보자 명진이가 능청스럽게 끼어들었다.

“야야, 얘가 너랑 같냐. 진형이는 연하라 싫은 거지. 넌 외모가 마음에 안 든다잖아.”


그랬다.

지숙이, 아니 지숙 누나는 나이 들어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로 세 살이 많았던 거였다.

쌩사수라 마음 고생이 상당했나 보다.

“거봐! 내가 우리 누나 같다고 했잖아! 히히히. 지숙 누나가 나중에 나 밥 사준대.”

좋다고 저렇게 실실 웃는 걸 보니, 이쪽도 썩 정상은 아니었다.

결국 선민이는 더는 못 듣겠다는 듯 강의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야, 어디 가? 곧 수업 시작해!”

“에이씨. 담배 한 대 빨러.”

명진이가 뒤통수에 대고 카운터 한 방을 날렸다.

“담배 피면 키 안 커. 이참에 끊어!”


선민이 등짝이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정말 수업 시간이 다 되어 자리에 앉으려는데, 뒤에서 명진이가 어깨를 툭 쳤다.

“야, 혜림이가 네 연락처 알려달라 해서 알려줬다. 괜찮지?”

“...어? 걔 잘되는 남자도 있다며. 근데 왜?”

“몰라. 별말은 없던데.”

명진이가 슬쩍 얼굴을 들이밀었다.

“혹시 그날 둘이 뭐 있었냐?”


부드러웠던 그녀의 손길.

숨이 막힐 만큼 가까웠던 향기.

순간 아련하게 떠올랐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했다.

이 자식한테만큼은 속마음을 절대로 들켜선 안 됐다.

“아니. 딱히 없었는데.”

명진이는 금세 흥미를 잃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알고 지내. 걔 친구 많거든.”

“...친구?”

“그래, 인마. 잘됐네. 너 친구 없잖아.”

이런 씨발. 이 새끼는 꼭 끝이 이 모양이다.

“일루 와. 일루 와.”

나는 곧장 녀석의 목을 잡아당겼다.

“알았어, 알았어. 놔봐. 놔보라고.”


친구라.

뭐, 어쨌든.

왠지 나쁘지 않은 아침이었다.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