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리 첫 동기모임

미팅 그 후.

by 토박이

우리의 두 번째 미팅 상대는 또다시 숙대였다.

바로 지숙 누나의 국문과 동기들.

한 번 미팅을 나가면, 거기서 또 다음 미팅을 주선해 줄 사람을 건졌다.

그러고 또 나가고, 또 연결되고, 또 마시고.

목적이 여자친구를 만드는 건지, 미팅 주선자를 확보하는 건지.

우리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제법 그럴싸한 미팅팸을 꾸렸고, 불나방처럼 미팅판으로 뛰어들었다.

몇 번 해 보니 패턴은 늘 비슷했다.

장소는 무조건 싸고 푸짐한 술집.

맛, 인테리어, 분위기 같은 건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명진이는 늘 총무처럼 돈부터 걷었다.

“회비는 오천 원씩.”

가끔 여자애들 중에 볼멘소리를 하는 애들이 있었다.

자기들은 술도 많이 못 마시는데 왜 똑같이 내냐는 거였다.

그럴 땐 명진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안주는 너희가 먹고 싶은 걸로 골라. 비싼 걸로.”

그러면 대개 거기서 말이 끝났다.

안주값이 술값보다 더 비쌌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그것도 다 우리가 먹었다.

쪼잔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한 달 생활비 20만 원.

거기서 통신비 빠지고, 지하철비 빠지고, 밥값 빠지고 나면 남는 게 용돈이었다.

남자라서 더 내는 여유는 사실상 사치였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나와 명진이가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이상하게 죽이 잘 맞았던 건.

쪼잔한 계산 앞에서만큼은 서로 너무도 정직한 인간들이었으니까.


그 와중에도 혜림이와는 몇 번 따로 만났다.

같이 있으면 이상하게 말이 잘 통했다.

크게 애쓰지 않아도 웃을 일이 생겼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가끔은 누군가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솔로였다.

나 역시 미팅을 즐기며 그녀를 만났던 처지라, 굳이 깊이 따져 묻지는 않았다.

그저 그 정도면 됐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고 나면 괜히 한 번 더 생각나는 사람.

스무 살엔 그런 관계 하나만으로도 외로움이란 딴 세상 얘기였다.




그렇게 ‘먹고 대학생’의 하루는 참 단순했다.

수업은 적당히 듣고, 학생식당에서 제일 싼 메뉴를 고르고, 시간만 나면 누구 자취방이든 기어들어가 뒹굴었다.

오늘은 또 무슨 재밌는 이벤트가 없을까.

누가 술이나 한잔하자고 부르지 않을까.

괜히 전화기만 만지작거리며 건수를 찾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한량처럼 자취방에 드러누워 빈둥거리던 오후, 전화벨이 울렸다.

동아리 동기 준수였다.


“야, 홍영기. 너 살아는 있냐?”

다짜고짜 날아온 첫마디에 피식 웃음이 났다.

“응. 죽지 못해 살아있다.”

“살아 있으면 동아리도 좀 나와야 할 거 아냐. 너 요즘 왜 이렇게 안 나오냐?”

나는 천장을 보며 괜히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냥 좀... 바빴지.”

“뭘 또 바빠. 너 맨날 안 바쁜 얼굴이던데.”

맞는 말이라 잠깐 말문이 막혔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돌렸다.

“하여튼 뭐, 이것저것 좀 있었어. 솔직히 말하면... 마음도 좀 뜬 것 같고.”

전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준수는 내 속을 다 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뜨긴 뭐가 떠. 너 지혜 누나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


순간 뜨끔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혜 선배가 내 얘길 썩 좋지 않게 하고 다닌다는 말이 귀에 들어온 뒤부터, 괜히 발걸음이

뜸해졌다.

가도 어색하고, 안 가자니 또 찜찜했다.

결국 내가 택한 건 제일 편한 방법이었다.

안 나가는 것.

참 스무 살답게 소심하고도 단순한 해결책이었다.


준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야, 솔직히 지혜 누나 좆같은 거 동아리 사람들 다 알아. 그니까 그냥 무시하고 한 번 나와라. 요즘 사람도 부족해. 벌써 그만둔 애들도 있고.”

나는 몸을 반쯤 일으켰다.

“벌써 그만둔 애들이 있다고?”

“그래 인마. 그러니까 너라도 좀 나와. 우리 오디션 때 기억 안나? 동아리 붙으면 진짜 열심히 해보자고 했잖아.”

그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기억났다.

마지막 오디션 날의 공기.

대기실에 서려 있던 긴장감.

끝나고 나서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고생했다고 웃던 얼굴들.

그때는 분명, 재미있을 줄 알았다.

정말로 뭔가 시작될 것만 같았다.

나는 괜히 베개 옆에 굴러다니던 빈 담배갑을 손으로 천천히 구겨버렸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우리 학번끼리 처음으로 동기 모임 하기로 했거든. 꼭 나와.”

“동기 모임?”

“어. 차기 집행부도 정해야 하고, 서로 좀 친해지게.”

할 일도 딱히 없었다.

동아리 안에서 그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도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언제인데?”

“확실히 나올 거지?”

“시간이나 말해.”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앞에서 보기로 했다. 빠지지 마라.”

나도 모르게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귀찮아서였는지, 기대돼서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알았어. 나갈게.”

“진짜지? 이번엔 잠수 타지 마라. 진짜다.”

“그래, 알았다고. 끊어 인마.”


툭, 하고 전화가 끊겼다.

나는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다시 드러누우려다가 그러지 않았다.

서먹했던 동기들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다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몰랐다.

“가보지 뭐.”

한동안 미팅만 주구장창 반복되던 한량 같은 생활도.

이제는 조금쯤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약속 당일. 장소는 민들레영토였다.

줄여서 민토.

그 시절 대학생들에게 민토는 거의 만능 아지트나 다름없었다.

‘문화비’라는 이름의 기본 요금만 내면 세 시간 동안 자리를 잡고 앉아 음료를 몇 번이고 리필해 마실 수 있었고, 컵라면도 1회 제공되었다.

조모임도 거기서 하고, 시험공부도 거기서 하고, 소개팅이며 동아리 모임까지 죄다 거기서 했다.

싸고 오래 버틸 수 있었으니 대학생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친구 준영이는 대학로 본점에서 층 매니저가 됐다고 한동안 입이 닳도록 자랑했었다.

거기 여자 직원들이 그렇게 예쁘다고, 너도 꼭 한번 와 보라고 어찌나 떠들어댔는지.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렇다면 배가 아파서 한동안 민토 근처엔 얼씬도 하기 싫을 것 같았다.

아무튼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가방을 대충 둘러메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세미나실이랬지.

준수가 알려준 방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 명 가까이 와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디션 때 복도에서 몇 번 마주쳤던 얼굴, 집회 모임에서 본 적 있는 얼굴들.

그 사이로 낯선 얼굴도 두어 명 섞여 있었다.

반대로 기억나는 몇몇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애들은 더는 안 나올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 바닥도 생각보다 빨랐다.

붙는 것도 순식간이었고, 사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내가 문 앞에 서자 누군가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어, 홍영기 왔다!”

곧 여기저기서 말이 튀어나왔다.

“영기, 이놈아. 진짜 살아 있었네?”

“잘 지냈어?”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냐?”

나는 손을 들어 대충 인사했다.

반갑긴 했다.

하지만 솔직히 조금은 불편했다.

몇 번의 집회 모임에서 본 게 전부인 사이였다.

얼굴은 기억나는데 이름은 잘 모르고.

반갑다는 말과 어색하다는 기분이 동시에 드는, 딱 그 정도의 거리.

나는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때였다.

“야, 너 오랜만이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 너는...”

누구였드라.

선 채로 잠시 머릿속을 굴리던 나는 이내 두 눈이 커졌다.


...경숙이?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