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 나한테 왜 그래 2

동해물과 백두산이

by 토박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책은 펼쳐져 있었지만 글자는 한 줄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딴 데를 볼 수도 없었다.

내 정신은 오로지 옆자리, 혜림이가 있는 그 좁은 공간에만 모조리 쏠려 있었다.

나는 그저 정면만 바라본 채 석고상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히힛”

혜림이가 휴대폰을 보며 피식 웃었다.

“무슨 얘긴데 그렇게 웃어? 누구야?”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응, 별거 아니야. 그냥 친구.”

혜림이는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또 키득키득.

누군지 물어보고 싶었다.

남자냐, 여자냐.

남자면 어떤 새끼냐.

근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어보는 순간 뭔가 달라질 것만 같은, 막연한 느낌 때문이었다.

우리 사이에 있는 이 가늘고 팽팽한 실이 툭 끊겨버릴 것 같은.

그래서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와 달리 혜림이는 참 태연했다.

책도 보고,

휴대폰도 보고,

중간중간 엎드려 잠깐 졸기까지 했다.

나만 죽을 맛이지, 이 애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애였다.

사람 마음은 들었다 놨다 하면서도 정작 본인 마음은 꽁꽁 감추고 있는.

여시 중에서도 아주 얄미운 불여시.


스르르.

혜림이가 내 오른쪽 어깨에 기대왔다.

이어폰을 꽂은 채로.

아무 말 없이, 그냥.

흐읍!

나는 숨을 멈췄다.

자는 건가.

기댄 건가.

아님 자려고 기댄 건가.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 판단도 되지 않았다.

혜림이의 머리카락이 턱 끝을 간질였지만,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일 분이 지났다.

오 분이 지났다.

십 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정면의 책만 바라보고 있다.

같은 페이지를 읽고 또 읽었다.

수십 번은 읽었는데도 무슨 내용인지는 하나도 몰랐다.


이십 분쯤 됐을까.

끄응.

어깨가 슬슬 저려오기 시작했다.

움직이면 깨울 것 같고, 안 움직이면 팔이 떨어질 것 같았다.

ㅅㅂ 옆에 있어달란 게 이런 뜻이었냐...

팔이 점점 무감각해졌다.

손가락 끝은 이미 남의 살 같았다.

근데.

움직이기가 싫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렇게 손모가지 하나 날아가 버릴 것 같던 그쯤이었다.

혜림이가 귀에서 이어폰을 빼더니 몸을 일으켰다.

“벌써 시간 다 됐네. 이제 가야겠다, 영기야.”

“어... 그래.”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자 정말 살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혜림이가 내게서 몸을 떼고 나니, 또 이상하게 아쉬웠다.

참 사람 마음이 간사했다.

내 마음이 그러거나 말거나 혜림이는 이미 책이며 노트며 가방에 척척 집어넣고 있었다.

아까까지 내 어깨에 기대 음악을 듣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손이 빨랐다.

왠지 서운했다.

이유를 딱 잘라 설명하긴 애매했지만,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나는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은 채 왼팔로 책을 가방에 쑤셔 담았다.

오른팔이 제정신을 되찾으려면 아직도 멀어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오늘 고마웠어.”

혜림이가 돌아보며 말했다.

“너 아니었으면 시작도 못했을 거야.”

쓰윽-

허걱!

그녀가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휘리릭, 뿅~!

나는 민들레영토에서 사라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꽃밭 한가운데다.

사방은 온통 꽃뿐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 많은 꽃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소용돌이치는 꽃잎 사이로 짙은 향기가 밀려왔다.

코피가 날 것 같았다.

아찔했다.

그리고.


두근 두근-

혜림이의 심장 소리가 내 가슴 쪽으로 조금씩 전해져 왔다.

꼴딱.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양팔을 어정쩡하게 든 채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안아야 하나.

가만히 있어야 하나.

등이라도 긁어줘야 하나.


그런데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머리와 달리, 내 빌어먹을 몸뚱이는 이미 통제 불능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거다.

아드레날린이 튀었다.

도파민이 활활 탔다.

온몸의 혈류가 어딘가를 향해 제멋대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우오옷, 씨발!!! 그쪽으론 가지 마!!!


내일 당장 밀리오레에 가서 엑스라지 힙합바지부터 사야겠다.

하필이면 왜 오늘 이 쬐는 바지를 입고 와서는.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혜림이는 천천히 껴안은 손을 풀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그만 갈까?”


아, 안 돼.

이대로 일어선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안 일어나?”

“어... 너 먼저 나가 있어.”

“왜 같이 안 나가구?”

“응... 나 화장실 좀 들렀다 가려고.”

이마에 땀이 삐질삐질 솟았다.

혜림이가 멀뚱히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얼굴을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그녀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졌다.

“있잖아, 너... 갑자기 발ㄱ...”

“으응? 뭐, 뭐가?”

그녀의 입술에서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내 목은 자라처럼 점점 쏙 들어갔다.


나, 남산 위에 저 쏘 나무~ 철갑을 두른 듯~~~!!!

파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 일쎄에에~~~!!!


죽기 살기로 2절을 이어 불렀다.

혜림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발그레해졌다고, 얼굴! 히히, 빨개서 귀엽네.”

그녀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

“알았어. 나 먼저 나가 있을게. 얼른 나와.”

혜림이가 가방을 들고 일어서며 커플석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다.

천장을 한 번 올려다봤다.


결국 나는 애국가를 4절까지 완창한 뒤에야 겨우 어기적어기적 민토를 나설 수 있었다.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