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또 1

슈렉 석찬이

by 토박이

석찬 선배.

동기 남자들은 다 군대에 가 있고, 혼자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는 99학번 선배였다.

원래 남자애들한테는 밥은커녕 인사도 잘 안 받아주는 사람이라, 그냥 무뚝뚝한가 보다 했었

다.

그런데 이 정도로 쓰레기일 줄이야.


“어쩐지. 내가 인사하면 받지도 않더라.”

준수가 그 말에 픽 웃었다.

“그건 너랑 라이벌이라서 그래. 크크큭.”

“뭔 소리야?”

“너도 여자 엄청 밝힌다고 소문났잖아. 자기 경쟁자라 생각해서 너 존나 싫어할걸.”

“씨댕. 장난하냐.”

“농담이야, 짜샤. 흐흐흐.”

잠깐 웃던 준수가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암튼 우리 다음 집회 때 마니또 뽑잖아.”

“어.”

“저 새끼 분명히 우리 동기 여자애들 노릴 거다. 안 봐도 뻔해.”


나는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타들어 가는 담배 끝을 바라봤다.

마니또라.

갑자기 그 말이 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겉으로 보면 그럴듯했다.

누가 누구를 몰래 챙기고, 편지를 쓰고, 작은 선물도 주고.

설레기 딱 좋은 이벤트였다.

그런데 동아리 방식상 신입생들은 결국 선배와 엮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남자 선배한테는 여자 신입생과 껀덕지가 생길 수 있는 아주 좋은 찬스였다.

좋게 말하면 교류고 나쁘게 말하면 사냥터랄까.

그 기울어진 구도를 석찬 선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준수는 담배를 바닥에 툭 떨어뜨리더니 발로 거칠게 짓이겼다.

“마니또 한다고 여자애들 괜히 설레 하고 있을 텐데, 저 새끼는 그런 거 다 이용해먹는 거지.”

나는 말없이 담배를 빨았다.

유진이의 반짝이던 눈빛이 문득 떠올랐다.

씁쓸했다.

담배 맛도 그랬다.

“하... 진짜 꼴 보기 싫어. 그만 들어가자.”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술집 안에선 여전히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 한가운데, 누가 흙탕물을 한 바가지 끼얹은 기분이었다.

청춘이라고 해서 다 반짝이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 안에도 저런 쓰레기 하나쯤은 꼭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단상에 선 음악부장 은영 선배가 악보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럼 오늘 연습했던 ‘먼지가 되어’를 마지막으로 한 번 불러보는 걸로 집회를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이니 다들 최선을 다해서 불러주세요.”

순간 숨소리조차 멈춘 듯 실내가 조용해졌다.

은영 선배가 반주부 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띵, 띠링— 띵, 띠링— 띵, 띠링— 띠딩.


마른 나무결을 스치는 듯한 기타 선율이 연습실 안에 잔물결처럼 번졌다.


바하의 선율에 젖은 날이면

잊었던 기억들이 피어 나네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기타를 치는 남자.

바로 석찬 선배였다.

쓰레기인 건 맞고 인정하기도 싫지만,

기타 실력 하나만큼은 진짜 악마의 재능이었다.

드럼까지 수준급이라니, 참 더럽게 얄미운 종류의 인간이었다.


작은 가슴 모두 모두어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악보를 든 모두의 얼굴이 한층 진지해졌다.

여름 공연 후보곡인 만큼 다들 평소보다 더 집중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살짝 눈을 감고 음을 붙였고,

누군가는 입술 모양까지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씁 뚜루루 씁 뚜루루 뚜바

씁 뚜루루 씁 뚜루루 뚜바


합창이 끝나는 순간, 방 안을 채우고 있던 긴장감이 스르르 걷혔다.

“와아-!”

한 명이 탄성을 터뜨리자, 이내 모두가 박수를 쳐댔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숨도 못 쉬게 집중하던 인간들이 맞나 싶을 만큼 금세 얼굴이 풀어졌다.

“다들 잘했어!”

“오, 오늘 엥간했지?”

“야, 기타 미쳤다 진짜.”

석찬 선배는 무심한 얼굴로 악기를 툭툭 정리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반주는 끝내줬다.

기분 나쁘지만 사실이었다.


그때 기장 상혁 선배가 앞으로 나섰다.

“자, 그럼 이상으로 오늘 집회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순간 여기저기서 벌써 눈빛이 달라졌다.

“모두가 기다리던 마니또 추첨이 있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실내가 한순간에 뒤집혔다.

“와아아아!”

“오오, 나이스!”

아까 합창이 끝났을 때보다 두 배는 더 시끄러웠다.

다들 합창보다 마니또가 더 기다려졌던 게 분명했다.



“자, 그럼 01학번 신입생들부터 뽑도록 하겠습니다. 여학생들부터 앞으로 나와 주세요.”

상혁 선배의 목소리가 울리자 분위기가 또다시 들썩였다.

오늘따라 동아리 연습실은 유난히 북적였다.

평소엔 코빼기도 안 비치던 남자 선배들이 우르르 몰려나온 탓이었다.

그것도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정장에 구두에, 머리도 손질하고 향수 냄새까지 풀풀~

어디 단체 맞선이라도 온 사람들 같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왜 다 나왔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추첨은 현장 참석자에 한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여자 선배들도 꽤 있었지만, 남자 수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신입생 여자 애들이 남자 선배들의 이름이 담긴 상자 앞에 일렬로 줄을 섰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 작은 손을 상자 안에 넣고 종이들을 휘휘 저었다.

그 순간, 남자 선배들의 몸이 일제히 앞으로 쏠렸다.

으, 제발!

“하하하하.”

뒤에서 탄식인지 기도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만도 했다.

신입생 여자 수는 한정돼 있었고, 남자 선배 수는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확률상 대부분은 또 기존 여자 선배들과 매칭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끼리 다시 매칭되는 건 사실상 도시가스 검침이나 마찬가지였다.

1년에 한 번, 때가 되면 하는...

다시 말해 의미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동기 여자애들에 이어 여자 선배들 추첨까지 모두 끝났다.

이제 남자들의 차례였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아수라 발발타...


속으로 주문을 외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놈인가, 저놈인가.

아니, 이건 아닌 것 같고.

그때였다.

온 몸을 관통하는 짜릿한 충격!

필이 빡 꽂혔다.

됐다. 이거다!

망설임 없이 확 낚아챘다.

달아날까 봐 본능적으로 꽉 움켜쥐었다.

느낌이 좋았다.

진짜로.



“자, 오래들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 게임이자 하이라이트! 오늘의 메인 이벤트! 우리 형님들 추첨이-”

상혁 선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정장을 빼입은 선배들이 우르르 뛰쳐나갔다.

순서는 최고령자, 영만 선배님부터.

회사원인 그는 오늘 야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이 자리에 나타났다.

하루 종일 화장실 한 번 안 가는 투혼까지 발휘하며 없는 시간을 짜냈다고 했다.

그깟 생리현상 따위로 그의 뜨거운 후배 사랑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상자 앞에 선 그는 깍지 낀 두 손을 천천히 돌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욱-

짧게 숨을 내쉰 영만 선배님이 상자 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종이를 뽑아드는 동작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는 잽싸게 손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그 모습을 신호탄 삼아 나머지 선배들도 줄줄이 돌진했다.

오늘만큼은 선배도 체면도 없었다.

오직 한 장의 종이.

그리고 그 안에 적혀 있을지도 모를 신입생 이름 하나가 전부였다.

이쯤 되면 마니또라기보다 보물찾기에 더 가까워 보였다.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