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모도 도마뱀
모든 추첨이 끝나자 상혁 선배가 앞으로 나왔다.
“오늘 뽑은 종이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시면 안 됩니다. 나중에 확인하시고요. 뒷풀이는 신세계 중국집에서 열릴 예정이니 많이 참석해 주세요.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곱게 들을 만큼 인내심이 뛰어난 위인은 이 자리에 없어 보였다.
“우오옷!”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게 환희인지 비명이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됐다.
표정만 보면 대충 답이 나왔으니까.
선배들은 그게 재미있는지 서로 낄낄거리며 외쳤다.
“나 뽑은 사람 누구야? 빨리 이실직고해~!”
결과가 어떻든 분위기 자체는 축제였다.
그 와중에 유독 얼굴빛이 썩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석찬 선배였다.
멀리서도 똥 씹은 표정이 선명했다.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개 꼬시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속이 다 시원했다.
그때 옆에 있던 준수가 내 옆구리를 툭 쳤다.
“야, 너 누구 뽑았냐?”
“아직 안 봤는데.”
“뭐야, 얼른 봐봐. 빨리.”
“그런 너는 누군데?”
“나? 나는 말야... 송희 누나지롱~~~! 흐흐흐.”
00학번 송희 선배.
웃을 때마다 마시마로처럼 눈이 쏙 사라지는, 귀엽게 생긴 누나였다.
같은 기수 성준 형과 CC였지만 특유의 상냥함과 배려심 덕에 후배 남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꽤 많았다.
이씨. 갑자기 부럽네, 이 새끼.
“야, 같이 보자. 얼른.”
준수가 재촉하며 내 손을 빤히 쳐다봤다.
결국 나는 주머니에서 꾸깃하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느낌은 분명 좋았는데...
솔직히 어제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었다.
정말이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보는 선배 누나들이 유난히 많이 나와 있었다.
다들 어쩜 그렇게 예쁘고, 귀엽고, 세련된 건지.
꼭 여자로 느껴져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아니, 물론 아주 아니라고 하면 양심에 좀 찔리긴 하지만...
아무튼 이게 다 공대생의 비애 때문이다.
강의실에 가도 남자, 과방에 가도 남자, 술을 마셔도 남자.
이건 뭐 고추밭 한가운데 박혀 있는 허수아비도 아니고.
해도 해도 너무 했다.
그러니 이왕 마니또를 하게 됐다면 예쁜 누나 하나쯤 걸려서,
“누나, 밥 사줘용~”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어?!
아주 건전하고 소박한, 공대생다운 로망이었다.
그래서 나도 결국 참지 못하고 종이를 조금씩 벌리기 시작했다.
자, 지금부터 확인들어가겄습니다잉~
땃 따라닷~ 따라닷~ 따따- 쿵짝짝! 쿵짝짝! 따라리라리라~
...응?
“조지혜네? 조지혜야!! 푸훗.”
눈을 세게 비볐다.
다시 봤다.
또 봤다.
글씨는 바뀌지 않았다.
조... 지... 혜...
조져부러따.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 많은 이름 중에.
성격 드럽고, 내 뒤에서 험담이나 하고 다니는 바로 그 지혜.
쟤만 아니면 됐는데.
세상에 쟤만.
나는 천장을 잠깐 올려다봤다.
시발 진짜 이러기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종이를 구겨 쥐었다.
“야! 나 뽑은 사람 연락해라! 주말에 우리 아웃백 가자~!”
어디선가 남자 선배 하나가 호쾌하게 외쳤다.
“형,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에요?”
“아웃백이면 거의 데이트 코스인데요?”
“와하하하!”
주변에서 곧장 웃음이 터졌다.
좋댄다~
아웃백은 무슨.
“끝나고 옥상으로 따라와.”
이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었다.
주머니 속 종이가 점점 더 구겨졌다.
뒷풀이를 위해 신세계 중국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마다 탕수육이며 군만두가 놓였고, 고량주 병도 하나둘씩 비워지고 있었다.
오늘따라 선배들이 많이 나온 덕에 술자리 규모가 남달랐다.
여기저기서 잔 부딪히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가게 안은 정신없이 북적였다.
어디서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옆 테이블 목소리도 제대로 안 들릴 지경이었다.
나 역시 꽤 기분이 올라와 있었다.
처음 맛본 고량주는 생각보다 입에 착 붙었다.
한 모금 삼키자 짜릿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고, 끝에는 파인애플 향이 은은하게 입안에 퍼졌다.
하지만 독주는 독주였다.
헤롱헤롱.
“자자! 짠!”
테이블 선배의 외침에 다 같이 얼른 잔을 들었다.
그리고 고량주를 입에 털어 넣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헉!
하마터면 조지혜와 눈이 마주칠 뻔했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어느 재수 없는 놈이 나를 뽑았을까나~
지혜는 두꺼운 목을 느릿하게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훑고 있었다.
혀만 길었더라면 코모도 도마뱀과 얼추 비슷했을 것이다.
케헥.
긴장한 나머지 고량주가 목에 탁 걸렸다.
쿨럭, 쿨럭.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인 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혜의 레이더망을 피해 조용히 화장실로 향했다.
아이고, 죽겄다.
비틀비틀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섰다.
찬물로 세수라도 한 번 하면 좀 살 것 같았다.
수도꼭지를 막 트려던 순간, 거울 너머 구석에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석찬이었다.
그 자식이 00학번 원준 선배를 붙잡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원준 선배가 무언가를 석찬 손에 슬쩍 쥐여줬다.
그때였다.
물소리에 고개들 든 석찬의 시선이 휙- 내 쪽으로 날아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원준아. 내가 술 한 잔 살게.”
그리고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깨동무를 한 채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한동안 세면대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뭐지?
원준 선배가 건넨 것.
석찬이 황급히 숨긴 것.
세면대에선 물만 콸콸 쏟아졌다.
술기운에 흐리던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졌다.
그리고 그 순간-
아, 시바.
...마니또 종이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