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납시오
“우오오.”
준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돌아봤다.
“그거 백 퍼 사귀는 거네. 모르긴 뭘 몰라. 껴안았으면 말 다했지 뭐.”
“그런가...”
잘 모르겠다는 건 진심이었다.
만나면 좋았다.
분명 같이 있으면 즐거웠고, 헤어지고 나면 늘 조금 아쉬웠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게 진짜 사랑이라는 감정인지, 아니면 그냥 설레는 건지.
스무 살엔 그 차이도 잘 몰랐다.
“븅신이냐, 진짜.”
준수가 혀를 찼다.
“근데 걔는 어떻게 만났는데?”
“혜림이? 미팅으로. 근데 정식으로 사귀자 이런 말은 아직 안 해서...”
“야, 다 끝났어. 그냥 사귀자고 하면 게임 끝나겠네.”
나는 가볍게 웃어넘겼지만, 마음 한구석은 계속 걸렸다.
"응, 별거 아니야. 그냥 친구."
나는 혜림이한테 어떤 존재일까.
그냥 심심할 때 옆에 있어주는 사람?
아니면 나처럼, 헤어지고 나면 조금 아쉬운 사람?
혜림이도 나랑 같은 마음일까.
“암튼 잘되면 한턱 쏴라, 알았제? 이씨 존나 부럽네, 이 새끼.”
준수는 그런 내 속도 모른 채 볼이 빵빵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쩐지 동아리 안 나올 때부터 알아봤어. 쩝... 야, 그냥 고구려 호프나 가자. 갑자기 다 귀찮다.”
준수가 터벅터벅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야, 같이 가 짜샤.”
혜림이와의 관계도, 내 마음도 아직 명쾌하게 결론난 건 없었다.
그 찝찝함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나는 부지런히 준수의 뒤를 따라갔다.
“야야, 잔 비었다!”
“여기 소주 한 병 추가요!”
“흐흐흑. 나쁜 계집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학교 앞 술집은 오늘도 어김없이 난장판이었다.
테이블마다 빈 병이 쌓이고, 안주 냄새와 담배 연기가 뒤섞였다.
우리도 그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선배들이 오기 전, 우리끼리 먼저 시작한 술자리.
기장이 된 승환이가 쭈뼛쭈뼛 잔을 들었다.
“우리 앞으로 동아리 생활 다 같이 잘해보자. 나 좀 많이 도와주고. 자, 01학번 파이팅!”
법대생답지 않게 건배사는 몹시 어색했다.
오히려 그 어리숙함 때문에 승환이의 말이 더 진심처럼 들렸다.
“파이팅!”
“짠!”
나는 입을 크게 벌려 소주를 한 번에 털어넣었다.
어설프게 끊어 마셨다간 알코올 냄새가 더 역하게 넘어왔기 때문이다.
“크으... 쓰다.”
“영기야, 안주도 좀 먹어. 앞으로 자주 얼굴 좀 보게.”
옆에 앉은 성훈이가 긴 팔로 멀리 있던 안주를 내 앞으로 집어줬다.
키가 무려 188인 성훈이는 우리 동아리에서 제일 컸다.
집도 강남에 얼굴도 그런대로 생겨서 딱 봐도 여자들한테 인기 많을 스타일이었다.
노래 실력은 솔직히 그닥이었는데, 얼핏 듣기론 지혜 선배의 강력한 추천으로 합격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생기고 그렇게 자란 놈이 또 이상하게 안 느끼하다는 점이었다.
몸에 밴 매너가 자연스럽기만 해서 왠지 좀 얄미웠다.
맞은편에서 준상이도 잔을 들었다.
“그, 그래. 우리 다, 당구장에서만 보지 말고 지, 집회에서도 좀 보자.”
말을 더듬는 이 녀석은 기타를 좀 쳐서 경숙이와 함께 반주를 맡기로 했다.
지은이처럼 재수생인데 얼굴까지 팍 삭아서, 말을 놓기까지 꽤 애를 먹었다.
첫인상만 보면 이미 대학원 두 학기쯤 마치고 온 얼굴이었다.
나와 준수, 성훈, 준상.
이 넷은 모두 같은 학교 공대라 학교 앞 당구장에서 종종 마주치곤 했다.
“영기야, 너 나랑도 짠해야지.”
건너편에 앉은 유진이가 잔을 불쑥 내밀었다.
미대생인 유진이는 솔직히 첫눈에 확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광대가 조금 있고 턱이 뾰족하게 빠져서, 굳이 표현하자면 살짝 사마귀 상이랄까.
그런데 애교가 워낙 많고 리액션이 좋아서 누가 무슨 말만 하면 제일 크게 웃어주는 애였다.
덕분에 선배들, 특히 나이 좀 있는 남자 선배들한테 유난히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나는 잔을 들어 유진이와 부딪혔다.
“자, 짠!”
“고마워. 근데 영기야.”
유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너 다음 주 집회엔 꼭 나와야 돼. 그날 마니또 뽑기로 했거든.”
“마니또?”
“어. 재밌을 것 같아, 그치?”
유진이는 꼭 자기가 이미 당첨된 사람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마니또는 내가 뽑은 한 사람을, 그 사람이 모르게 몰래 챙겨주는 놀이였다.
누가 내 마니또인지, 또 내가 누구를 맡았는지는 끝까지 비밀.
우리 동아리에선 다른 학번끼리 남자는 여자, 여자는 남자를 뽑는 방식이었다.
기간은 다음 추첨 때까지.
스무 살짜리들한테는 이런 게 또 기막히게 잘 먹혔다.
“유진아, 걱정 마라. 영기는 무조건 나올 거다.”
준수가 옆에서 히죽 웃었다.
“왜 그러는데?”
“얘 은근 이런 거 되게 좋아해. 혼자 설레는 타입이거든. 크흐흐.”
“지랄 말고 술이나 마셔.”
소주가 한 잔 두 잔 돌았다.
처음엔 어색하게 웃던 애들도 슬슬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몇 번의 집회 모임에서 눈인사만 나누던 사이가, 술잔을 부딪히는 사이 어느새 제법 편해져 있었다.
술이란 게 참 묘했다.
나는 잔을 채우며 슬쩍 테이블을 둘러봤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준수가 내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봐봐. 내가 나오라고 했잖아.”
"알았어, 인마."
준수와 기분 좋게 잔을 기울이던 그때였다.
“어, 오셨다!”
유진이가 먼저 벌떡 일어섰다.
그 시선을 따라 우리도 자연스럽게 문 쪽을 봤다.
선배들이었다.
00학번 집행부 선배들이 우르르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한 명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99학번 석찬 선배였다.
들어오자마자 테이블을 쭉 훑어보는 눈빛이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불편했다.
“안녕하세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어, 앉아. 앉아.”
선배들이 자리를 잡으며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중 한 명이 나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야, 홍영기. 너 왜 이렇게 안 나와.”
“아... 그냥 좀 바빴습니다.”
“바쁘긴 뭐가 바빠. 앞으로 자주 나와.”
“예, 예.”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다시 앉으려다가 문득 옆을 봤다.
준수 표정이 이상했다.
평소의 그 능청스럽고 느긋한 얼굴이 아니었다.
나가자.
준수가 턱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 바깥으로 향했다.
나는 선배들 쪽을 향해 대충 웃어 보인 뒤 몸을 뺐다.
곧바로 조용히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술집 문을 밀고 나오자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준수는 기다렸다는 듯 담배부터 꺼냈다.
라이터를 튕기는 손끝이 평소보다 거칠었다.
나도 말없이 한 대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나서야 준수가 짜증 섞인 숨을 길게 내뱉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준수는 담배를 입에 문 채 턱으로 술집 입구를 가리켰다.
“저 새끼. 또 왔네.”
“누구? 석찬 형?”
“형은 무슨. 완전 개새끼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술집 안쪽을 힐끗 쳐다봤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준수는 대답 대신 바닥에 끈적한 침을 탁 뱉어냈다.
말은 안 해도 상당히 열받은 모양이었다.
“저 새끼 때문에 우리 동기 여자애 벌써 하나 나갔잖아. 쟤가 하도 집적대가지고.”
“헐. 진짜?”
“그래. 동아리 안에서 여자만 몇 번을 사귀었대. 지금도 신입생 어떻게 해보려고 맨날 기어 나오는 거야, 저 새끼.”
들어오자마자 테이블을 쓱 훑던 그 눈빛.
그게 인사가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