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석으로 주세요
“...경숙이?”
사자머리 그녀.
아니, 정확히는 한때 사자머리였던 그녀였다.
오디션 날 봤던 그 강렬한 머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부스스하게 사방으로 뻗치던 갈기 대신, 매직으로 쫙 펴진 긴 생머리가 어깨 아래로 차분히 흘러내렸다.
걸을 때마다 머릿결이 찰랑거렸다.
같은 사람인데도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었다.
“어, 경숙이 왔어?”
“늦었네. 얼른 자리에 앉아.”
마지막으로 도착한 경숙이는 내 앞에 멈춰 서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홍영기, 오랜만이야.”
“어... 그래.”
내 쪽이 오히려 더 어색했다.
경숙이는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왜. 못 알아보겠지?”
“아니, 뭐... 조금?”
나는 괜히 머쓱해져 뒷목을 긁적였다.
“머리는 또... 언제 했대.”
경숙이가 기다렸다는 듯 손으로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내렸다.
“누구 때문에 했는데. 어때, 이제 좀 괜찮아?”
“어. 인자 좀 사람 같네.”
“뭐래. 짜증 나.”
툭 던진 한마디였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투가 생각보다 편했다.
적당히 털털하고, 적당히 장난스럽고, 딱히 가시가 서 있지도 않았다.
괜히 마음 한구석이 좀 찔렸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경숙이가 내게 뭘 잘못한 적은 없었다.
그저 나는 첫인상 하나만 보고 멋대로 판단했고, 가벼운 말까지 얹어 놓고는 혼자 어색해졌을 뿐이었다.
정작 경숙이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그게 더 미안했다.
경숙이가 내 표정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또 갑자기 사람을 그렇게 보냐? 아무튼 앞으로 자주 좀 나와.”
“알았다. 노력해 보마.”
경숙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찰랑, 또 생머리가 흔들렸다.
인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준수가 앞으로 나섰다.
“자, 이제 슬슬 오늘 제일 중요한 거 하자. 차기 집행부 정해야지.”
방 안이 금세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기본 선출 방식은 추천제였다.
적임자를 추천하고 이유를 말한 뒤, 특별한 이견이 없으면 그대로 확정하는 식이었다.
먼저 기장 얘기가 나왔다.
몇몇 이름이 오가긴 했지만, 분위기는 금세 승환이 쪽으로 기울었다.
법대생이라 그런지 평소에도 묵묵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승환이가 만장일치로 우리 기수 기장이 됐다.
다음은 반주 부장.
이건 사실 회의랄 것도 없었다.
지혜 선배가 전부터 경숙이를 강하게 밀었다는 얘기도 있었고, 무엇보다 음대 피아노과라는 타이틀이 너무 확실했다.
반주를 맡길 사람이 따로 없었다.
문제는 마지막이었다.
행사 부장.
모임 장소 섭외, 뒤풀이 진행, 사람들 챙기기, 끝나고 남은 뒷정리 하기까지.
이름만 들으면 그럴듯했지만 실상은 온갖 잡일 담당이었다.
방금 전까지 거침없이 추천이 오가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결국 종이에 이름을 적어 투표하자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랍지도 않게 준수였다.
“야, 너네 진짜 의리 없다.”
준수가 억울하다는 듯 펄쩍 뛰었지만 소용없었다.
“축하한다, 행사 부장.”
“네가 앞으로 우리 기수의 머슴이다.”
준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진심 어린 안도를 삼켰다.
동아리에 뜸하게 나온 게 이렇게 다행일 수가.
차가운 얼음을 아그작아그작 씹으며 강 건너 불구경하던 그때.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준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 혼자 절대 못 한다. 부원 한 명 붙여줘.”
다들 인정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합리적인 요구라는 분위기였다.
“그럼 네가 골라.”
순간 어금니가 시큰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홍아, 어디 있니. 우리 홍아~”
씨발...
어쩐지 오늘 졸라 나오기 싫더라니.
해가 저물자 참살이길 골목엔 하나둘 술집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이제 막 밤 장사가 시작되는 시간.
행사 부장인 준수와 나는 2차 뒷풀이 장소를 섭외하기 위해 먼저 민토를 나왔다.
선배들도 몇 명 온다기에 넓고 조용한 곳을 찾는 게 관건이었다.
준수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앞장서 걸었다.
나는 그 뒤를 터벅터벅 따라가며 녀석에게 투덜댔다.
“야. 왜 하필 나야, 진짜.”
준수가 힐끗 돌아보며 답했다.
“왜긴 왜야. 믿을 만하니까 그랬지.”
“지랄. 나 진짜 그런 거 졸라 하기 귀찮은데.”
“그럼 나는? 난 뭐 좋아서 하겠냐. 그냥 우리 둘이 X됐다 생각하고 참고 하자. 응?”
준수는 허탈한 표정으로 씩 웃더니 내 어깨를 툭 쳤다.
이 녀석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이미 단단히 코가 꿰어 있었다.
이제 와 물릴 수도 없었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녀석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술집이 몰려 있는 골목 몇 군데를 돌아보던 중, 준수가 불쑥 물었다.
“야, 그동안 어케 지냈냐. 혹시 여자친구 생겼냐?”
“아니, 아직 솔로다. 너는?”
“나도 없지, 인마. 아씨... 참.”
녀석이 말끝을 묘하게 흐렸다.
슬쩍 옆을 보니,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뭔데. 말해봐.”
“뭐를.”
“표정이 왜 그래. 꼭 똥 마려운 개처럼.”
“야, 표현 진짜 더럽네.”
“그럼 빨리 말하든가.”
준수는 한동안 괜히 헛기침만 하더니, 마침내 목소리를 낮췄다.
“비밀이다. 너만 알아라.”
“아, 알았다고.”
준수는 입꼬리를 씰룩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나 지은이 좋아한다. 푸핫.”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최지은? 키 작고 좀 통통한 애?”
“어.”
“헐.”
진심으로 헐이었다.
최지은.
얼핏 보면 동글동글하고 순하게 생겼다.
눈매도 선하고, 웃으면 볼이 동그랗게 말려 올라가 나름 귀여웠다.
근데 그건 정말 얼핏 봤을 때 얘기였다.
조금만 같이 있어 보면 안다.
기가 얼마나 센지.
그것도 엄청나게.
목소리도 크고, 할 말은 다 하고, 웬만해서는 기죽는 법이 없었다.
차분한 얼굴로 사람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거기다 재수생, 즉 우리보다 한 살 위였다.
더 놀라운 건 지혜 선배와 중학교 동창이라는 거였다.
“너, 진짜? 지혜 선배 친구인 걔를?”
“응.”
준수가 멋쩍게 웃었다.
“왜, 이상하냐.”
“이상하다기보다... 근데 쫌 그런데.”
“왜. 지은이 괜찮잖아.”
“괜찮긴 하지. 그 말이 아니고.”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걔 좀 빡세잖아. 나이도 한 살 누나고.”
“한 살이 무슨 누나냐. 친구지.”
그건 맞는 말이었다.
대학에 오고 나서 제일 이상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나이 문제였다.
현역과 재수는 한 살 차이여도 말을 트고 친구처럼 지냈다.
그런데 삼수부터는 두 살 이상 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깍듯이 형이라고 불렀다.
웃긴 건, 정작 재수와 삼수는 한 살 차이밖에 안 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재수는 삼수한테 꼬박꼬박 형이라고 불러야 했다.
거기다 동갑인 현역 선배한테도 또 형 대우를 해야 했다.
기준이 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재수생 입장에선 꽤 불합리한 세계였지만, 뭐 어쩌겠나.
현역인 내 입장에선 딱히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래서 지은이는 지혜 선배한테는 반말을 하고, 다른 00학번 선배들한테는 존댓말을 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반말과 존댓말이 뒤섞여 묘한 광경이 연출되곤 했다.
“그래, 암튼 잘해봐라.”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준수가 곧장 옆으로 바짝 붙으며 물었다.
“너는? 좋아하는 사람도 없냐?”
“뭐... 좋아하는 사람까지는 모르겠고.”
“오~ 누군데.”
“그냥 연락하는 애는 있는데. 잘 모르겠어.”
“이쁘냐?”
나는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혜림이.
지난 주말, 그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주말 오후, 혜림이한테서 문자가 왔다.
레포트 써야 하는데 심심해. 옆에 있어줄 수 있어?
문자를 세 번 읽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읽었다.
옆에 있어달라고.
나는 거의 뛰다시피 신촌으로 향했다.
약속 장소는 민들레영토.
청자켓을 걸친 혜림이는 멀리서도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원래도 예쁜 애였지만, 그날은 유난히 더 그래 보였다.
혜림이가 나를 보자 손을 살짝 흔들었다.
“쉬는 날인데 나오라 해서 귀찮은 거 아니야?”
“아니야. 나도 곧 시험이라 책 좀 봐야 했거든. 잘됐지 뭐.”
목욕탕에서 때나 한 바가지 밀까 하던 참이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꽤 침착하게 나왔다.
입구에서 알바생이 단정하게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어디로 안내해 드릴까요?”
혜림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커플석으로 주세요.”
쿠궁.
커플석.
그 말이 귓가를 쿡쿡 찔렀다.
하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안내받은 자리는 구석 쪽이었다.
등받이가 천장까지 닿을 것처럼 높았고, 한쪽 방향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는 구조였다.
말하자면 둘만의 작은 공간이었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한번 하고 혜림이 옆에 앉았다.
바로 옆에서 은은한 향기가 훅 스쳤다.
혜림이한테선 늘 좋은 냄새가 났다.
뭔가 달콤하면서도 가벼운.
뭐라고 딱 설명할 수는 없지만 괜히 사람 숨을 조심하게 만드는 향기였다.
“크흠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을 열었다.
책을 꺼내고, 필통을 꺼내고, 볼펜을 책 위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괜히 손만 분주했다.
그때였다.
혜림이가 작게 투덜거렸다.
“여기 좀 덥다.”
그러더니 청재킷을 스르르 벗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돌릴 수가 없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하얀 끈나시.
분명히 그렇게 됐을 것이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야, 인마. 침착해라.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더워서 겉옷 벗은 것뿐이다.
나는 속으로 나 자신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혜림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레포트 자료를 꺼내 펼쳤다.
안경까지 꺼내 쓴 혜림이가 책을 보기 위해 몸을 숙이는 순간,
이제껏 몰랐던 그녀의 반전 매력이 불쑥 눈에 들어왔다.
어헛. 이 새끼 정신 안 차릴래?
너도 그만하고 이제 책 좀 보라고!
홍영기, 할 수 있지? 아자!
그렇게 나는 교재의 첫 줄만 다섯 번째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