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다 달아
“자, 이번 게임은 삼육구 업그레이드야. 내가 지정한 숫자가 들어갈 땐 박수치는 거다. 다들 이해했지?”
명진은 사악한 미소를 띤 채 여자애들을 한 명 한 명 훑어봤다.
몇 번의 게임이 지나자 여자애들 얼굴은 이미 복숭아처럼 익어 있었다.
“그럼 간다! 이오칠~ 이오칠! 이오칠~ 이오칠!”
“일!”
짝!
“삼!”
“사!”
“오! ..... 꺄악!”
“와하하하하~”
또 효진이다.
아까부터 자꾸 걸렸다.
게임을 못 하는 건지, 술이 취한 건지.
“술이 그렇게 먹고 싶었나 보네. 자, 한 잔 받아.”
명진이 효진의 잔에 벌주를 넘치도록 따라줬다.
“효진아, 못 먹겠으면 마시지 마.”
혜림이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렸다.
“에이, 규칙은 규칙이지. 힘들면 흑기사 써.”
명진에겐 예외란 없었다.
효진이 잔을 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옆에 앉은 선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민이 씨익 웃었다.
“거절하면 두 잔이다. 알지?”
효진은 그럼 됐다는 듯 손바닥을 쫙 펴 보였다.
“참나. 그럼 마실게.”
그리고는 잔을 들어, 꿀꺽.
다른 여자애들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하지만 명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게임 템포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호호호! 효진이가 걸렸으니까 네가 게임 정해.”
효진은 입가를 훔치며 잠시 생각하더니, 번쩍 눈을 빛냈다.
“이미지 게임! 이 중에서 제일 재수 없는 사람은? 하나! 둘! 셋! 너! 너!!!”
혼자 발끈해서 다짜고짜 명진을 찍었다.
“푸훗, 뭐야. 쟤 완전히 개 열 받았네.”
“히히히. 명진이 걸렸으니까 얼른 마셔!”
테이블이 한 번에 들썩였다.
다들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속이 다 시원한 표정이었다.
명진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래 인정.”
실제로 봤다면 정말로 재수 없는 대인배 코스프레였다.
명진은 벌주를 망설임 없이 털어 넣었다.
“이번 한 번은 봐주는데, 다음부턴 진짜 얄짤 없다. 다들 정신 차려라.”
테이블 위 공기가 다시 팽팽해졌다.
“그럼... 간다~!”
“베스킨~ 라빈스~ 써리~ 원!”
“일이삼!”
“사오!”
한 사람이 연달아 숫자를 최대 세 개까지 부를 수 있고, 31을 외치는 사람이 벌칙을 받는 게임.
한 번에 몇 개를 부르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기 때문에, 빠른 계산과 순간 판단이 필요하다.
“이십오... 이십육!”
“이십칠 이십팔 이십구.”
이제 진형의 차례.
진형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다음 순서인 효진을 바라봤다.
“사암~ 시입~! 쏘오리~”
“삼... 십일. 이힝, 어떡해.”
게임에 또 걸린 효진이었다.
새터에서 지옥훈련까지 거친, 공대생인 우리를 상대하기에는 그녀들은 아직 너무 풋내기였다.
우리는 모든 게임에서 그녀들을 압도했다.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
명진은 노래를 부르며 효진 잔에 벌주를 다시 꽉 채웠다.
그녀는 잔을 두 손으로 쥔 채 선뜻 입에 가져가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어깨까지 들썩이며 깐죽대는 명진.
효진이 결국 잔을 들어 입에 가져가려던 바로 그 순간-
탁.
누군가 그 잔을 낚아채더니, 망설임 없이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선민이었다.
“우오오~~~”
의외의 상황에 술자리의 공기가 한 번에 달아올랐다.
효진은 벙찐 얼굴로 선민을 바라봤다.
“크윽... 흑기사 했으니까 소원 들어줘야지.”
그리고는 멍한 효진의 앞접시에 치킨이랑 소시지를 착착 올려놓았다.
“내 소원은... 남은 음식 다 먹기.”
잠깐 뜸을 들이더니, 멋쩍은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우리 엄마가 음식 남기면 벌 받는댔어.”
......
이게 먼 개소리야!
평소 차가울 정도로 시니컬한 녀석이 맞나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시덥잖음이 미팅 자리에서는 묘하게 치명적이었나 보다.
효진이 소시지 하나를 집어 선민 쪽으로 슬쩍 내밀었다.
“너두... 안주 좀 먹어.”
선민은 잠깐 주춤했다.
딱 0.5초.
그리고 조용히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
염병들 허네.
“잠깐만 쉬자. 나 화장실 갔다 올게.”
명진의 선언에 길었던 게임이 드디어 멈췄다.
다들 어깨가 스르르 내려오며 테이블 위의 긴장이 천천히 풀려가던 그때였다.
응?
왼팔뚝에 따뜻한 체온이 살짝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혜림이었다.
“효진이 좀...”
나는 선민이와 한창 얘기 중인 효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효진이 고개를 돌리자, 혜림이 내 앞으로 상체를 쑥 내밀었다.
샴푸인지, 향수인지.
은은한 향기가 얼굴을 감쌌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효진아, 너 많이 마신 거 아니야? 괜찮아?”
“나 조금 취해써. 히히. 근데 아직까진 괜찮오. 혜림이 너눈?”
둘은 나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이어갔다.
비켜주기도, 그렇다고 그냥 있기도 애매했다.
혜림이 몸을 살짝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 끝이 내 턱을 간질였다.
점점 숨이 가빠왔다.
내 숨소리를 들킬까봐, 뜨거운 숨이 그녀에게 닿을까봐.
꼭 죄를 짓는 것만 같은...
“흐읍...”
혜림이가 슬쩍 나를 바라봤다.
“영기야... 너 얼굴 되게 빨개.”
“쿨럭, 쿨럭!”
결국 참아오던 숨이 기침과 함께 터져 나왔다.
“너 괜찮아?”
혜림이가 물컵을 건네며 물었다.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며 입가를 훔쳤다.
쓰윽.
내 팔 위로 그녀의 손이 자연스럽게 얹혀졌다.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신경 쓰지 말자.
아까도 그랬잖아.
무의식적인 거겠지.
잘 되고 있는 남자도 있다는데.
명진이가 분명히 말했다.
...근데 왜 이리 따뜻하냐.
나는 괜히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그때 화장실 갔던 명진이가 돌아왔다.
내 얼굴을 보더니 미간부터 찌푸린다.
“야, 얘는 또 왜 이래.”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허리를 곧게 세웠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뜨거웠다.
명진이가 자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이만 들어갈까?”
혜림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우리도 많이 취했어.”
명진이가 계산에 나섰다.
“너희는 오천 원씩만 내. 나머지는 우리가 낼게.”
여자애들이 지갑을 꺼내는 사이, 그는 먼저 카운터로 향했다.
나는 정신도 차릴 겸 물을 한 잔 들이켰다.
혜림이가 건네준 물컵.
...입술이 닿았을까.
괜히 잔의 가장자리를 한 번 바라봤다.
술이 취한건지 물맛이 이상하게 달게 느껴졌다.
술집 문을 나서자 밤공기가 확 스며들었다.
담배 냄새 대신 서늘한 공기가 폐를 훑고 지나갔다.
취기가 조금 가라앉자, 초반의 어색함이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다들 말없이 술집 거리의 네온사인을 밟으며 천천히 걸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바람을 타고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왔다.
가슴속에 터지는~ 힘으로, 힘으로~!
우리 학교 응원가, 엘리제를 위하여.
아마 학교 안 잔디밭 어딘가, 막걸리 한 사발 앞에 둘러앉아 목청껏 부르고 있을 것이다.
명진이, 선민이, 진형이, 그리고 나.
‘한 판 때려, 말아?’
말은 없었지만 눈빛은 같았다.
“호적수를 눌러서~ 울려라, 승전고를~!”
그런데 먼저 튀어나온 건 우리가 아니었다.
여자애들 네 명이 동시에 응원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진형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 니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
지숙이는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우리 숙고동 모임이랬잖아. 숙면여대랑 고구려대 연합이거든.”
노래만이 아니었다.
손을 휙휙 돌리며 안무까지 척척 맞춰 보였다.
길거리 한복판, 네온사인 아래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진형의 눈빛이 묘하게 젖어들었다.
어랍쇼, 쟤 좀 봐라.
선민이는 효진이와 귓속말을 나누며 히히덕거렸고, 명진이는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다.
다들 설마...
스무 살의 첫 미팅.
두근거림은 이렇게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번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