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놀아보자
“야, 뭐야. 애들 다 괜찮다매!”
선민이 먼저 불만을 터뜨렸다.
“내 앞에 효진이? 걔는 나보다 더 큰 것 같애. 멀대야 완전.”
“키는 그렇다 치고.”
진형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거들었다.
“지숙이는... 진짜 우리 누나 느낌이야. 아무리 봐도 세 살은 연상인 것 같은데.”
기대했던 첫 미팅.
상상과는 정말 많이 달라서 다들 황당한 표정이었다.
불만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오늘 미팅을 주선한 명진이를 돌아봤다.
“근데 공대생이라며? 과도 다 다르던데. 어떻게 된 거야?”
명진이는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긴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실은 아까 혜림이랑 오면서 얘기했는데... 원래 나오기로 한 애들이 갑자기 파토냈대. 연대랑 미팅이 잡혔다고 전부 글로 갔단다.”
이런 제기랄.
결국 우리는 땜빵으로 나온 애들과 오늘 미팅을 하고 있었던 거다.
게다가 하필이면 연대라니.
숙적도 이런 숙적이 없다.
괜히 자존심이 곱빼기로 상했다.
명진의 이실직고에 한동안 다들 말이 없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담배 끝만 빨갛게 타들어갔다.
그 순간, 선민이의 쫙 찢어진 눈매가 더욱더 가늘어졌다.
“그럼 뭐야...”
녀석이 가지처럼 긴 턱을 내게 치켜들며 말했다.
“명진이는 혜림이랑 친구니까 빼고... 이제 삼대일인가?”
피식.
녀석의 같잖은 도발에 웃음이 났다.
“야... 키도 작은 게 그렇게 올려다보면 목 안 아프냐? 턱 내려, 인마. 그러다 디스크 와.”
“옆으로 서봐. 어깨까지는 나랑 똑같고만, 새꺄. 니 대가리 때문에 더 커 보이는 거야.”
선민은 지지 않고 내 옆에 바짝 붙어 어깨를 맞댔다.
그 모습을 본 진형이 뒤에서 우리 어깨에 팔을 툭 걸쳤다.
“180도 안 되는 꼬마들이 말이 많네. 귀엽네 아주, 하는 짓들이.”
“꺼져, 븅신아.”
나는 진형의 팔을 걷어치우고 슬쩍 발뒤꿈치를 들었다.
“명진아, 니가 봐봐! 진형이랑 나랑 별 차이 없지!?”
선민이도 질세라 끼어들었다.
“야, 야! 어깨까지는 내가 영기보다 더 크지 않냐? 제대로 좀 봐 보라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달아올랐다.
시작은 장난이었는데, 다들 전투력이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의외로 팽팽한 긴장감이 가로등 아래를 맴돌았다.
그런데 정작 주선자인 명진이는 그 소란 속에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이상했다.
원래 저렇게 입이 무거운 놈이 아닌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녀석은 담배를 천천히 한 모금 빨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야, 근데...”
마침내 명진이가 입을 열었다.
담배 연기가 입술 사이로 느리게 새어 나왔다.
“혜림이, 지금 잘 되고 있는 남자 있어.”
“뭐라고?”
듣고 보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나는 담배를 바닥에 꾹 짓이기며 명진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럼 오늘은 왜 나온 건대?”
“여자애들 어색할까 봐. 또 나도 있고 하니까... 그냥 얼굴만 비추러 나왔대.”
순식간에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방금 전까지 나름 설레는 마음으로 웃고 떠들었던 게 민망할 지경이었다.
선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계산이 끝난 얼굴이었다.
“그럼 2차는 안 가는 거지? 솔직히 돈 아깝다.”
“당연하지.”
나도 툭 맞장구쳤다.
“있는 술이나 좀 먹다 들어가자.”
그때 진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근데 계산은 어떻게 해? 우리가 다 내?”
명진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한 번은 여자가 쏘고 나머지는 남자가 내는 게 깔끔한데. 오늘은 뭐, 여기서 끝낼 거니까 조금 보태달라고 하면 되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너무 태연한 모습이 왠지 더 얄미웠다.
“다들 첫 미팅이잖아. 오늘은 그냥 개시했다는 데 의미 두자. 응?”
스무 살.
우리는 아직 '의미'라는 말 한마디에 다시 고개를 끄덕일 만큼 단순했다.
“야야, 들어가서 재밌게 놀자. 오늘 망하면 다음에 또 하면 되지. 안 그래?”
명진이는 우리 어깨를 차례로 툭툭 치며 말했다.
“그래... 술이나 오지게 마시자.”
“어차피 집에 바로 가긴 좀 그렇지.”
“맞아. 얘들 기다리겠다. 얼른 들어가자.”
그래.
실망은 실망이고,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꽁초를 바닥에 비벼 끄고 포차 문을 밀었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던 소음과 열기가 다시 우리를 맞았다.
그렇게 다시 전장으로.
달라진 게 있다면 하나다.
처음의 그 설렘이, 담배 연기처럼 허공 어딘가로 흩어져버렸다는 것이다.
“야! 왜 이렇게 늦었어! 너네 우리 뒷담화 했지? 흐흐흐.”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하이톤의 목소리가 훅- 치고 들어왔다.
지숙이가 진형이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웃음 끝에 애교까지 살짝 묻어났다.
오늘 내내 조용하던 애가 맞나 싶었다.
둘러보니 애들 얼굴이 죄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체리소주가 슬슬 약발이 올라오기 시작한 모양이다.
“어, 어... 아니야. 화장실도 가고, 애들 담배도 좀 피고... 술, 술이 없네. 사장님~!”
진형이가 손을 내저으며 말을 더듬었다.
저 새낀 왜 저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짝! 짝! 짝!
그때 명진이 박수를 쳤다.
“자, 이제 어색한 것도 다 풀렸겠다. 게임 한 판 갑시다.”
명진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울리진 않았지만 나름 전략가의 눈이었다.
“일단 남자 여자 자리 섞어 앉고.”
그의 말이 떨어지자 우리는 군말 없이 자리를 바꿨다.
내 왼쪽엔 혜림이, 오른쪽엔 효진이.
어깨가 슬쩍 스치고,
무릎 끝이 잠깐 닿았다 떨어지고,
그리고 코끝을 간질이는 달콤한 화장품 냄새...
“크흠, 흠...”
괜히 숨이 짧아졌다.
따악! 콸콸콸-
“걸리면 벌주 마시기야. 벌주니까 소주 좀 더 탄다!”
명진이는 뚜껑을 딴 소주를 피처에 통째로 들이부었다.
“야야, 너무 취해 그럼!”
혜림이가 눈을 크게 뜨고 말렸다.
“안 걸리면 되지, 안 걸리면.”
명진이는 씩 웃으며 병을 내려놓지 않았다.
“못 먹겠으면 흑기사라는 좋은 제도가 있잖아. 흐흐흐.”
기어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털어 넣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 피처에 꽂혔다.
붉은 체리소주 속으로 소주가 섞이며 천천히 소용돌이쳤다.
작고 투명한 폭탄.
여자애들 얼굴에서 웃음이 스르르 걷혔다.
남자들 눈빛도 순간 또렷해졌다.
이거... 까딱하다간 X된다.
웃는 사람은 단 한 명.
한쪽 입꼬리만 비스듬히 끌어올린 명진이가 우리를 천천히 훑어봤다.
“자, 그럼...”
트레이드마크인 재수 없는 표정과 함께.
“우리 제대로 한 번 놀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