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가 명진이
그 일 이후로 동아리 모임만 가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웃음이 터져도 선뜻 끼어들지 못했다.
누군가 귓속말이라도 나누면, 내 이름이 오가는 건 아닐까 괜히 귀를 기울였다.
특히 지혜 선배.
그녀가 내 얘기를 좋지 않게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화음보다 사람들의 표정을 먼저
살피게 됐다.
결국 나는 드문드문 얼굴만 비추는 이름뿐인 회원이 되었고, 연습실 문턱은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료한 날들이 흘러가던 어느 아침이었다.
첫 교시 강의실은 늘 그렇듯 졸음과 피곤으로 잠겨 있었다.
다들 책상에 엎드리거나 창밖을 멍하니 보며 교수만 기다리던 그때.
귀를 긁어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뻥 차고 들어왔다.
“미팅 할 사람~! 선착순 세 명!”
명진이었다.
녀석은 오른손을 번쩍 들더니, 마치 혁명을 선포하듯 외쳐댔다.
“나... 나! 나~!”
팔을 괴고 엎드려 있던 나는 본능적으로 튀어 올랐다.
나를 필두로 여기저기서 손이 빠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명진아 나도!”
“개콜! 나도 껴줘!”
“내가 먼저 들었어!”
순식간에 명진이 주위로 애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돗대기시장 한복판을 헤치고 명기 앞에 딱 선 나는, 가슴팍을 콕 찍으며 말했다.
“내가 제일 먼저 들었거든?”
명진이 나를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목포 촌놈, 너도 하게? 여자애들이 시골 사람이라고 싫어할 텐데.”
“야. 내가 나가야 평균이 올라가지.”
“쳇, 이 새끼 모르게 할 걸. 이번에 애들 상태 괜찮다던데.”
순간 혈압이 빡 올랐다.
“진짜 죽을라고 이게.”
명진의 목에 팔을 둘러 헤드록을 걸자, 녀석이 발버둥을 쳤다.
“어? 한 번 다시 말해봐. 뭐라고?”
“아, 알았어! 이거 놔봐, 놔봐!”
얼마 못 가 항복 선언이 떨어지고 나서야 팔에 힘을 풀었다.
명진이는 목을 주무르며 인상을 찡그리더니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그럼 이번 미팅은 영기, 진형이, 선민이까지. 끝!”
“나이스!”
“참나...”
탈락자들이 아쉬운 얼굴로 자리로 돌아가자, 우리 셋은 명진 곁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근데 어느 학교랑 하는데? 과는?”
“진짜로 괜찮대? 누가 해 주는 건대?”
질문이 폭풍처럼 쏟아지자 녀석은 머리를 가다듬으며 한껏 폼을 잡았다.
특유의 재수 없는 표정은 덤이었다.
“숙대 공대생이야. 거기 다니는 친구가 주선자고. 걔도 나올 거야.”
...여자 사람 친구라고?
너한테?
평소 행색을 보면 여자 그림자도 구경 못 할 것 같던 놈이었는데.
말이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낸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나 보다.
이런 놈한테도 여사친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솔직히 조금 부럽기도 했다.
“오늘따라 돈까스가 무지 땡기네. 어이 시골 친구, 돈까스는 먹어 봤지? 어때, 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미팅 전까지는.
“그래. 돈까스 콜... 대신 치돈은 안 된다. 시바...”
내 인생 첫 미팅이 그렇게 잡혔다.
드디어 미팅 당일.
약속 장소는 운암역 3번 출구 앞.
우리 학교의 먹자골목인 참살이길로 이어지는 출구다.
굳이 카페도 식당도 아닌 이 출구 앞을 고른 건, 전적으로 명진이의 전략이었다.
만나서 별로면 바로 근처 술집으로 직행하자는 것이다.
역시 생긴 대로 참 계산적인 녀석이다.
나보고 목포 촌놈이라고 놀리는 주제에, 자기는 서울 깍쟁이답게 빈틈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 중 유일하게 미팅 경험이 있는 게 명진이였다.
불만이 있어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명진이는 느긋하게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하지만 우리 셋은 달랐다.
진형이와 선민이는 매력을 어필할 멘트를 연습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는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출구 쪽을 계속 힐끔거렸다.
그때였다.
“명진아!”
출구 아래에서 밝은 목소리가 튀어 올라왔다.
짧은 머리에 또렷한 인상의 여자 하나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분위기로 보아 주선자였다.
명진이 담배를 비비며 물었다.
“왜 혼자야? 다른 애들은?”
“화장실 잠깐 들렀어. 너네 오래 기다릴까 봐 나 먼저 올라온 거야.”
그녀는 우리 쪽을 한 번 쓱 훑어보더니, 먼저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해요.”
웃는 상에 나름 귀여운 얼굴이었다.
괜찮은데?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말은 안 했지만, 눈빛은 이미 희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잠시 후.
출구 계단 아래에서 그림자 셋이 천천히 올라왔다.
주선자가 손을 흔들었다.
“인사해. 내 친구들.”
명진의 동공이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렸다.
“명진아, 근데 우리 어디로 가? 배고프당.”
미묘한 정적.
명진이 우리를 돌아보며 낮게 말했다.
“...저기 운암포차나 갈까?”
“와하하하하!”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새끼야, 그걸 또 네가 다 처먹냐?”
시끄러운 고함과 웃음소리.
거기에 퀴퀴한 담배 냄새까지 들러붙는 이곳은 미팅 장소라기보다 시장통에 가까웠다.
이 근방에서 싸고 푸짐하기로 소문난 술집, 운암포차다.
그 한가운데, 남자 넷 여자 넷이 마주 보고 쪼로록 앉아 있었다.
눈을 맞추는 것조차 어색해, 다들 괜히 메뉴판 글자만 들여다보거나 빈 잔만 만지작거렸다.
눈치를 살피던 여자 주선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일단 자기소개부터 할까?”
“크흠, 그래. 그럼 나부터 할게.”
명진이는 우리 남자들을 슬쩍 훑어보더니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동갑이니까 서로 말 편하게 하자. 나는 김명진. 혜림이랑 친구야. 만나서 반가워.”
“와아아...”
여자애들이 쭈뼛쭈뼛 손을 들며 어색한 미소와 함께 박수를 쳤다.
소개를 마친 명진이 오른팔로 내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어... 안녕. 나는 홍영기야. 만나서 반가워.”
“난 이진형이야. 만나서 반가워.”
“나는 박선민. 나도... 반가워.”
“와아아...”
기대와 달리 밋밋했던 우리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이번엔 여자들 차례였다.
“나는 이혜림이야. 얘네랑 나는 같은 과 친구들은 아니고, 숙고동이라는 모임 동기들이야. 오늘 재밌게 지내보자!”
혜림이의 소개를 시작으로 나머지 여자애들의 자기소개가 줄줄이 이어졌다.
이름, 전공, 사는 곳까지.
우리보다 훨씬 성의가 느껴졌다.
다들 또박또박 말했지만, 테이블의 관심은 이상할 만큼 한쪽으로만 기울어 있었다.
혜림이 말고는 다들 영 시큰둥한 표정.
첫 미팅이라 잔뜩 부풀었던 기대만큼, 실망도 빠르게 번지는 모양이었다.
“어색하니까 일단 술부터 시키자. 사장님, 여기요~!”
나름 베테랑답게 명진이가 재빨리 분위기를 수습했다.
안주는 가성비 끝판왕, 패밀리 특 모듬 안주.
술은 미팅인 만큼 막걸리 대신 체리소주 피처로 골랐다.
명진이가 잔을 들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같이 짠!”
“짠~!”
달달한 체리소주.
사실 이건 신의 한 수였다.
소주는 쓰고, 맥주는 배가 불러 여자들이 선뜻 손이 잘 안 가는 술이다.
하지만 과일소주는 다르다.
달콤한 맛에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어느새 가랑비에 옷 젖듯 취기가 올라와 있다.
물론 꼭 거나하게 취해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어색한 분위기를 녹이고 자리를 살리려면, 적당한 취기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그렇게 술이 순식간에 몇 잔 돌았다.
목소리는 한층 높아졌고, 말끝에는 웃음이 슬쩍 붙기 시작했다.
그때 명진이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말없이 불을 붙이려던 순간, 혜림이가 칼같이 제지했다.
“야, 담배는 좀 나가서 피워. 우리 담배 냄새 싫어해.”
명진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우리를 향해 슬쩍 눈짓을 보냈다.
“아, 미안. 알겠어. 그럼 남자들... 다 같이 한 대 피고 오자.”
“난 담배 안 피는데.”
눈치 없이 앉아 있는 진형이의 목덜미까지 낚아채 끌고, 우리 넷은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자 술집 안의 고함과 웃음소리가 한 겹 멀어졌다.
서늘한 바깥 공기가 뺨을 스치는 그 순간, 수컷 호랑이들의 은밀한 회의가 조용히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