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날의 기준

불안을 다른 자리에 두는 일

by 두부

— 아무 결정도 하지 않는 시간


나는 아주 작은 변화에도 쉽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말투가 평소보다 단호하게 느껴지거나,

답장이 조금 늦어지거나, 일정이 갑자기 바뀌는 순간에도 내 안에서는 작은 경계경보가 울린다.

그 경보는 처음에는 조용하다. 그냥 예민한 감각처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사소한 일들이 연달아 겹치면

그 소리는 점점 커진다.


하루 안에 몇 번이고 울리기 시작하면 그날은 이미 ‘흔들리는 날’이 된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어깨가 단단하게 굳고, 심장이 조금 빨라진다. 잠이 얕아지고, 밤에는 눈을 감고도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밥을 먹어도 맛이 잘 느껴지지 않고 입안이 마른다. 불안이 몸을 먼저 점령한 뒤 생각이 따라오는 식이다.


그 상태에 들어가면 머릿속은 순식간에 엉망이 된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여기저기로 튀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끌어와 미리 결말을 만들어버린다.


“혹시 내가 실수한 건 아닐까.”

“그 말의 의미가 다른 건 아니었을까.”

“지금 당장 뭔가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은 해결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같은 지점을 맴돌며 반복된다. 나는 그 안에서 무한한 생각 루프에 빠진다. 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떠올리고, 다른 가능성을 덧붙이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이 루프는 사유라기보다 회전이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움직임. 불안을 줄이기 위한 생각이 아니라 불안을 증폭시키는 순환.


예전의 나는 이 루프를 끝까지 따라갔다. 결론을 내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았고, 지금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관계도, 나도, 일상도 모두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많이 생각했고, 더 많이 상상했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를 통째로 빼앗기곤 했다.


지금도 흔들리는 날은 온다. 나는 여전히 예민하고, 작은 변화에도 반응한다. 경보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나는 루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조금 더 빨리 알아차린다.


“아, 지금 나는 또 루프에 빠져 있구나.”


그 문장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나는 억지로 생각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불안을 밀어내려 하지도 않는다. 대신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이건 생각으로는 끝나지 않을 일이라는 것. 직접 부딪혀보거나, 시간이 흘러야만 정리될 문제라는 것. 그 순간, 나는 그 생각에 이름을 붙인다.


보류.


보류라고 명명하는 순간, 그 문제는 오늘 당장 해결해야 할 일에서 자리를 옮긴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서가 바뀐다. 불안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의 위치를 조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린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다. 가슴은 여전히 답답하다. 하지만 해야 할 일들은 그대로 존재한다.


메일은 와 있고, 정해둔 일정은 남아 있고, 생활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기준으로 삼는다.

불안을 먼저 해결한 다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면서 불안이 따라오게 둔다. 설거지를 하고,

정해둔 루틴을 그대로 진행하고, 답을 내지 않아도 되는 일부터 처리한다. 하루를 구성하는 작은 일들을 하나씩 이어간다.


흔들리는 날의 기준은 나를 완전히 안정시키는 기술이 아니다. 그날의 나를 정상 상태로 복구하는 방법도 아니다. 그저, 불안이 나의 하루 전체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경계를 긋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조그만 변화에도 반응한다. 여전히 긴장하고, 여전히 흔들린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반응이 곧 결론은 아니라는 것. 생각이 폭주해도 나는 오늘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도

하루를 통과할 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삶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기준이 있다는 건 강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무너지는 지점을 조금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 기록은 불안과 침묵, 판단을 미루는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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