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상담 프로그램이 처음 계획과 달리 중도에 끝나버린 이후에 나는 마음을 확고히 먹었다.
'반드시 이 집을 탈출하리라.'
엄마, 아빠에게는 이야기하지 않고, 지하철을 타고 서울 시내 여기저기 혼자 살만한 동네를 탐색하러 나섰다.
당시, 프로젝트성으로 진행하는 업무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 일거리가 적은 시기에 집을 구하러 다닐 시간 여유가 충분했다.
바로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혼자 살기 좋다는 동네와 그동안 살아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곳, 앞으로 일하게 될 회사와 가까운 지역 등 다양한 곳을 물색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동네 중에서 딱 한 군데를 정했는데, 처음 자취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서울 치고는 전월세 집값이 꽤나 저렴한 편이어서 무리 없이 자취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에는 네이버와 다방의 원룸 매물을 확인하면서, 집이 마음에 들면 곧장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인터넷에서 확인하고 연락드렸는데요.
원룸 매물 남아있을까요? 매물번호 불러드릴게요.
대신 아무 집이나 보지 않고, 1차로 걸러낸 집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반지하였다.
간혹 부동산에서는 가능한 금액대를 듣고는 가장 먼저 반지하를 추천해 줬지만, 나는 아무리 넓게 빠지거나 신축일지라도 가족들과 살면서 이런저런 고생으로 질려버린 반지하는 절대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은 이야기하지 않고, 안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고, 비밀스럽게 집을 구하기 시작한 지 몇 주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집을 구하기는 정말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는 직접 부딪치며 집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무작정 거리를 걸으면서 발품을 팔던 중 한 부동산에 들어가게 됐는데, 정말 운이 좋게도 그곳에서 조건이 맞는 좋은 집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적정한 계약금.
바람을 쐴 수 있는 공원.
반지하가 아닌 지상층.
내가 원하는 조건과 모두 맞아떨어졌고, 얼른 집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곧 바깥에 주차되어 있는 부동산 직원의 차에 올라탄 후, 운명의 집으로 향했다.
드디어 내 집을 만날 수 있겠다는 희망이 피어올라서 마음이 조금씩 떨려왔다.
마음속 기대와는 달리 그날 날씨는 구름이 끼어서 하늘은 어두침침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집은 살짝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었는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서 피부에 닿는 공기가 제법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똑똑'
"안에 계세요? 부동산에서 나왔어요."
집 안에는 기존에 살고 있는 세입자가 외출을 나갔는지 아무도 없는 듯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빈집이지만, 실례를 한다는 생각으로 부동산 직원을 뒤따라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어진 지 이십여 년 정도 됐을 것 같은 빌라였기 때문에 계단을 올라가면서부터 느꼈지만, 내부도 깨끗한 편은 아니었다.
누르스름한 벽지.
살짝 녹이 슬고 고장이 나서 일이 분마다 물이 한 방울 똑 떨어지는 싱크대 수도꼭지.
세입자가 들여놓은 퀸사이즈 침대며, 50인치 텔레비전과 잡지랑 먹다 만 과자가 널브러져 있는 테이블로 꽉 들어차 발 디딜 틈이 거의 없는 집안.
하지만 들여놓은 물건만 봐도 다른 원룸에 비해서 한 사람은 더 누울 수 있을 만큼 넓게 느껴지는 집이었다.
좁은 집에 살면 갑갑해서 밖으로만 돌아야 할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이 정도만 돼도 집안에서 밥도 해 먹고, 글을 쓰면서 이런저런 작업을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세요? 근처에 걸어서 5분 거리에 지하철 역도 있고요.
원하시는 조건이랑도 맞는 듯한데요.
부동산 직원이 말했다.
나는 화장실 수압이 좋은지 물을 틀어보기도 하고, 변기 물도 내려봤다.
그리고 혹시나 천장에 곰팡이가 피어있지는 않은지, 침대와 책상은 어떻게 들여놓을 수 있을지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리며 여러 가지를 확인해 보았다.
이 집도 언제 나갈지 몰라요.
요즘 이 정도 매물만 돼도 워낙 귀해서요.
어떻게, 생각 좀 해보시겠어요?
아니요, 이 집으로 할게요.
근데, 계약서는 어떻게 써야 돼요?
조금 낡기는 했어도 마음에 쏙 들었고,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잔금을 치르는 방법이나 대출은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우선 이 보금자리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계약금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집을 보러 다니다 보니 좋은 매물을 구하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급했다.
그날 저녁, 안방에 있는 엄마를 불러 식탁에 함께 앉았다.
나는 엄마에게 도장을 찍은 계약서를 내밀었고, 엄마는 남편이라는 존재가 없이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일이 생겼다는 낌새를 느꼈는지, 퉁명스러운 어투로 거실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아빠를 불러들였다.
지금 뭐 하고 있어??
지금 얘 독립한다는데, 못 들었어??
앉아만 있지 말고 얼른 와서 얘기 좀 해봐.
두 사람은 가까이 마주 보기만 해도 투견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움을 벌였기 때문에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곧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갈 전역 군인과 같이 평화를 맛볼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걱정도 서서히 안심으로 바뀌어갔다.
아직은 낯설고 긴장되는 첫걸음이지만, 멀리 푸른 언덕에서 불어오는 희망의 바람이 상처 투성이인 마음을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