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수백만 년의 공포의 기억

융의 영혼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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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편도체를 살펴보자. 편도체에는 우리의 조상들이 수백만 년 동안 생존을 위해 겪었던 수많은 사건에 대한 감정의 기억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이란, 특정 사건의 구체적인 장면이나 세부적인 정보가 아니라, 그 사건을 경험하면서 느꼈던 감정에 대한 추상적이고 무의식적인 기억을 의미한다.


한 개인이 살아온 삶의 구체적인 기억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그 사람이 경험한 감정 중 일부, 특히 생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감정은 유전될 수 있다. 이는 동물 실험과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여러 세대에 걸친 관찰 연구를 통해 비교적 최근에 밝혀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생존에 중요한 감정이란 무엇일까?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이 가득했던 과거 환경에서, 외부의 사소한 자극에도 즉각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은 생존에 분명 유리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감정이 바로 공포다. 이러한 공포의 감정은 무의식의 형태로 편도체에 저장되었고, 세대를 거쳐 유전되어 왔다.


이에 대한 비교적 명확한 증거가 바로 아기들이 보이는 뱀이나 높은 곳에 대한 공포 반응이다. 아기들은 실제로 뱀을 보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경험이 없음에도, 그러한 자극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 반응을 보인다. 이는 공포에 대한 감정 기억이 개인의 경험을 넘어, 조상으로부터 유전되었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


공포 반응과 관련된 흥미로운 사례 하나를 소개하겠다. 이 사례는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어권 신경과 의사 에두아르 클라파레드(Édouard Claparède)에 의해 20세기 초 처음 보고되었으며, 이후 조지프 르두의 『느끼는 뇌』에서 정서 기억 연구의 대표적 사례로 소개되었다.


당시 클라팔드(Édouard Claparède)는 해마가 손상되어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는 한 여성을 진찰하고 있었다. 해마는 주로 단기기억과 일화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이기 때문에, 이 부위가 손상되면 방금 만난 사람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이 환자는 클라팔드를 만날 때마다 그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클라팔드는 매번 악수를 하며 자신을 다시 소개해야 했다.


어느 날, 클라팔드는 이 환자에게 짓궂은 장난을 친다. 손에 조그만 압정을 숨긴 채 평소처럼 환자와 악수를 시도한 것이다. 그 순간 환자는 손에 통증을 느끼고 깜짝 놀라 손을 재빨리 뒤로 빼며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 이후로 이 환자는 클라팔드와의 악수만큼은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의료진이 그 이유를 묻자, 환자는 “그냥 클라팔드라는 의사가 싫다”고 말할 뿐, 구체적인 이유는 설명하지 못했다.


이 환자가 클라팔드를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악수를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클라팔드와의 불쾌한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이 편도체에 무의식적인 감정 기억으로 저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해마가 손상되어 의식적인 기억을 형성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공포나 불쾌감과 같은 감정 기억은 편도체에 저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다.


그렇다면 공포라는 무의식적 감정을 저장하는 편도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과학자들은 실험 쥐의 편도체를 제거한 뒤 고양이와 마주하게 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쥐는 더 이상 고양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양이의 몸을 주둥이로 툭툭 건드리자, 오히려 고양이가 당황해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이와 유사한 인간의 사례도 보고된 바 있다. ‘S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한 여성은 편도체가 손상된 상태(우르바흐–비테 병)였으며, 그 결과 극단적으로 공포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이 여성은 어두운 밤거리를 걷다 흉기에 찔리고 총상을 입는 위험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겪었음에도, 공포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이 사례는 편도체가 인간의 공포 반응에 얼마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공포라는 감정은 트라우마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공포는 트라우마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감정이다. 정신적·육체적 위협을 동반한 충격적인 경험은 강렬한 공포를 유발하고, 이는 다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같은 트라우마로 이어질 수 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은 이후 사소한 자극에도 과도한 공포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보이는 여러 선천적인 공포 반응은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수많은 생존 위협과 트라우마의 결과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수백만 년이라는 아득한 시간 동안 공포라는 감정은 반복적으로 트라우마로 각인되었고, 그 흔적이 고스란히 편도체에 축적되어 왔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융이 말한 그림자가 단순한 심리적 은유를 넘어, 뇌과학적으로도 실체를 지닌 개념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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