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를 깨우는 일상의 몰입
인간에게 노동이란 무엇일까? 일을 하면 우리는 돈을 벌 수 있다. 그 돈은 우리 삶의 곳곳에서, 아니 거의 모든 부분에서 필수재로 소모된다. 인간에게 노동은 곧 생존 경쟁이다. 하여 많은 이들이 원치 않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좋아하지 않는 분야, 능숙하지 못한 업무, 혹은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일들까지. 이처럼 노동은 인간에게 꽤나 많은 미움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노동이 삶의 필수 요소이기에, 우리는 온갖 장애물을 무릅쓰고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삶의 숙제’처럼 이를 대한다.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이나 과제를 즐기는 대학생을 찾아보기 힘들듯, 노동을 좋아하는 직장인 또한 드물다. 우리에게 노동이란 그런 것이다. 나의 존재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임이자, 기회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벗어던지고 싶은 ‘불편한 옷’이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을 도구화하는 데 가히 귀재라 할 수 있다. 어쩌면 개별 인간이 아닌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의식 행위가 이런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른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라는 표어를 보며 자란 세대가 있을 만큼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신성시해 왔다.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며 이러한 외침은 당연하게 들리기도 한다.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인간에게 좀처럼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집단을 이룬 이래로 사회는 끊임없이 속삭여왔다. “너의 자유를 포기하는 만큼, 너의 생존을 보장하겠노라!” 이 기적 같은 약속은 인간에게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주는 강력한 이행 문구였다.
이렇듯 우리는 일하지 않는 자에게 무척이나 엄격했다. 인간 사회를 통틀어 세월 속에 결속된 약속을 외면하는 자, 공동의 안녕에 무책임한 자, 혹은 보편적이고 타당한 도덕관념에 저항하는 자로 그들을 인식해 왔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관념 생물의 든든한 보험이 되어주었고, 인간들을 끊임없이 일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노동에 대한 압박이 강해질수록 인간은 더욱 간절히 탈출을 꿈꾼다. 숨 쉴 공간과 휴식이 절실해진다. 그리하여 인간이 사회로부터 얻어낸 최후의 권리가 바로 “경제적 자유를 이룬 후 은퇴하는 삶”이다.
이 시대의 직장인 대다수는 은퇴를 희망한다. 물론 준비 없는 은퇴가 아닌, ‘준비된 은퇴’ 말이다. 한 달에 얼마를 쓰며 무엇을 하고 지내든, 내 몸이 부서져 흙이 되는 순간까지 물질적 빈곤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자유.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은퇴를 꿈꾸며 스펙을 쌓고 좋은 직장과 높은 직급을 향해 쉼 없이 달린다.
당연하게도 대다수는 이러한 희망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다. ‘준비가 덜 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 혹은 ‘의지와 관계없이 어쩔 수 없는’ 같은 수식어들을 삶에 붙이곤 한다. 인간에게 노동은 시작도, 과정도, 끝도 참으로 고통 가득한 험난한 동반자다.
그런데 정말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은퇴를 맞이한다면, 우리가 상상한 대로 우아하고 충만한 여생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은퇴자가 있다. 탑골공원에서 장기를 두는 어르신, 은퇴 후 소일거리를 찾아 경비 업무를 보시는 친구 아버지, 여전히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나이 지긋한 세차장 사장님. 시골에만 가보아도 허리가 휘어 제대로 서지 못하는 할머니가 밭에서 김을 매고, 손가락 마디가 퉁퉁 부어 주먹 쥐기도 불편하다는 아저씨가 삽을 들고 논으로 향한다. 물론 경제적 이유도 있겠지만, 몸이 그렇게 아픈데도 왜 매일 아침 나오시느냐 물으면 대개 비슷한 답이 돌아온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게 더 아파.”
이 답변은 단순히 병리학적이나 해부학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만히 있을 때보다 활동할 때 발생하는 긴장감이 신체 건강에 유익하다는 식의 교과서적인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 습관이 되어버린 ‘일상적 몰입’을 찾는 것이다.
몰입은 극심한 신체적 고통이나 정서적 혼란을 잠시 잊게 해 준다. 삶에 대한 불안, 건강에 대한 걱정, 가족에 대한 애잔함 등 인간이 끊임없이 사유함으로써 발생하는 ‘의식 활동의 찌꺼기’를 내려놓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의식하고 사유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 모든 고민을 홀로 껴안은 채 품 안에서 빙빙 돌리고 있다는 뜻이다. 행위가 멈추면 고민을 해결하거나 해소할 방법도 사라진다. 그저 끝없이 증식하는 번민만이 남을 뿐이다.
결국 노동은 생존의 고통을 잊게 하는 해결책으로, 이별의 아픔을 달래는 치료제로, 그리고 무기력한 권태를 깨우는 즐거움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오랜 시간 인간 사회가 쌓아 올린 노동의 가치는 잉여 생산물, 화폐 교환을 통한 조직의 결속, 혹은 집단을 도구화하기 위한 통치 수단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인간에게 노동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노동과 직업에 삶의 태반을 의지하며, 이를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끝없는 의식 활동의 ‘중재자’로 채택한다.
일상의 몰입을 통해 끝없는 사유의 바다에서 조난당하기를 거부한 인간의 자발적인 선택. 노동은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