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꽃나무를 위하여

<같은 바다, 부레 없는 우리 - 제3부 가족>

by 쌍둥이 아빠

한 꽃나무를 위하여


지금 나의 사랑은 꽃나무와 쌍둥이들과 나누기 위해 종전의 세 배가 되어 있다. 내 품의 사랑을 세배로 만들었으니, 우리들의 사랑은 기적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어떤 일은 그리되기까지 복잡하지만 당연했음 직한 과정을 거친다. 나의 사랑도 복잡했지만, 당연한 과정을 거쳤다.


고교 시절 등굣길. 같은 시간에 늘 마주치던 초등학교 동창이 있었다. 같은 반인 시절 부반장이었고 나는 나부랭이였는데.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아침 등굣길에서 마주친 그 아이는 무척 예뻤다. 그 후로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지났다. 짝사랑은 너무나 혼란스럽고 괴로운 일이었다. 괴로운 마음은 나를 음악 듣기와 일기 쓰기로 이끌었다.


그 전에도 그랬지만. 그 후에도, 크거나 작거나 섬세했던 모든 일들이 하나의 운명을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었다. 마치 엄마 배 속에 작은 세포였던 태아가 매 순간 크고 작은 우연의 과정을 거쳐 운명적 자아가 되었듯. 나중에 알았다.


직장에서 자리를 잡았고 몇 번의 소개팅과 짧은 만남이 반복되었다. 또 그간 살면서 못 해봤던 일들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무작정 달리다 보니 몇 년이 지나 있었다. 강가에 나가 밤새 낚시를 하다 보니 또 몇 년이 지나 있었다. 오래된 기타와 격정을 나누다 보니 또 몇 년이 지나 있었다. 내게 무심했고, 마음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크고 작은 일들은 늘 있었다.


사랑은 늘 타이밍 좋게 찾아오는 것. 나를 좋게 봐주던 상사가 주선한 사내 소개팅을 거절했고, 소개팅을 할뻔했던 그녀를 본관 사무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만 그녀를 원래 알고 있던 사람으로 착각해 반갑게 인사했다. 그녀는 의아하고 기분나쁜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예쁜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녀를 추종하고 바라보게 되었다. 나와는 다른. 아주 하얀 사람이었다. 꽃나무 같았다. 작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 날엔가, 퇴근 후 시내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차창 밖으로 그녀가 검은 봉지를 들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용기였을까. 차를 세우고 급히 반만 몸을 뺀 채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러 세웠다. 나는 왜인지 한 꽃나무가 너무 쓸쓸하게 느껴졌다.


집이 어디냐는 말, 어디 다녀오는 길이냐는 말, 지금은 어느 부서에 있냐는 말. 아는 말들을 아주 아주 천천히 나누었다. 나는 애꿋은 땅바닥만 한발로 긁었고, 그녀는 바나나를 사러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해는 지고 배도 고픈데, 이리 쓸쓸한데, 아직 우린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사랑은 그렇게 타이밍 좋게 찾아오는 것. 인사 발령이 있던 날 저녁의 시내는 늘 아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간 그녀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날 우연히 그녀를 보았고, 그녀가 있던 무리에 나도 섞여 술을 마셨다. 그녀에게 한마디 말도 붙이지 못했지만, 그녀도 취한 나도 어쩐지 좋기만 했다.


나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홀어머니에 외아들이었다. 가까이 오면 담배 냄새도 많이 나는 사람이었다. 가끔 나는 무척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약간 유머가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좀 무겁고 우울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오래된 슬픔에 휩싸여 나조차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없었지만. 또 몇 차례 이 마음을 그만둘까 외면하였지만. 망설임의 불씨를 오래 지켜온 끝에. 몇 번의 계획된 우연을 반복한 끝에. 또 몇 번인가의 완성하지 못한 이별을 머금은 후에. 결국 그렁그렁한 눈으로 서로를 불러세운 끝에. 쓸쓸함을 견딜 수 없는 서로를 보며,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던 것이다. 첫 만남이 있던 날부터 부부가 된 후의 일상을 늘 상상하고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워하고 있었던 듯도 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나와 아내를 각각 닮은 쌍둥이 딸들이 안기어 있다. 우연이 아니었다. 생에 모든 일들이. 태아가 매순간 크고 작은 우연을 거쳐 운명적 자아가 되었듯. 이렇게 되려 한 일들이었다.


일상과 피로, 우울과 슬픔도 그래서인지 저래서인지 어느 사이 그만 무뎌져 있었다. 그래서 사랑한 것인지. 사랑해서 그리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돈 많이 벌고, 맛있는 거 먹고, 어디 여행 가면 좋고. 별로 고민도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나의 꽃나무가 실로 어떤 여인인지는 나만 아는 비밀에 부쳐두고 싶더라는 것이다. 그저 나의 한 꽃나무로 영원히 품고 싶어지더라는 것이다.


나는 처음 나 아닌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서 나 자신을 조금은 애처로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윽고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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