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야기 >> 베트남 전쟁을 가르치려는 동료들에게
≫ 김선옥(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
책을 많이 읽어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 펼쳐 보고 싶은 책은 흔하지 않다. 교육자로서의 방향을 고민할 때, 내 책장으로 온 지 10년쯤 된 두 권의 책이 여전히 떠오른다. 리처드 세넷의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파커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가 그것이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기술’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기술’을 이야기하는 앞의 책과, 다름과 차이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똑같은 의자를 마련하고 둘러앉는 것이 왜 민주주의의 근본인지를 설명하는 뒤의 책.
역사교육자는 무엇을 위해 ‘교육’하는가?
그 과정에서 베트남 전쟁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베트남의 수도는? 나는 잘 몰랐다. 호찌민이 북부인지, 남부인지, 호찌민과 하노이 중 어디가 수도인지 늘 헷갈렸고, ‘경기도 다낭시’라고 불렸던 곳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베트남어의 6성조에 대해서는 내가 베트남에 간다고 하니 옆자리 동료가 알려주었다. 베트남은 나에겐 그저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었고, 베트남의 민간인을 학살한 한국군은 마땅히 베트남에 사죄해야 했고,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은 호찌민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견결히 지킨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지켜나가면서도 인민의 삶을 위해 경제를 부흥시키려 노력하는 주체적인 나라였다.
그러나 웬걸. 베트남은 내가 알던(안다고 생각했던) 베트남이 아니었다.
벌써 이곳에 온 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코로나19 때문에 국경 한번을 못 넘어본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베트남을 보고, 느끼고, 경험했다. 뜻밖의 베트남, 전쟁이라는 무게에서 잠시 벗어나 삶의 현장 베트남을 둘러보자. 베트남에게 전쟁만 있는 건 아니다. 베트남 전쟁에 민간인 학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베트남을 너무 모른다. 조금 더 알아야, 거리두기도 가능하다.
◇ 날씨도, 지형도, 먹는 것도 다 다른 북부, 중부, 남부
북부의 깔끔한 쌀국수 퍼(Phở), 중부의 미꽝(Mì Quảng)과 얼큰한 분보훼(Bún Bò Huế), 갖가지 향채와 풀을 넣어먹는 남부의 후띠우(Hủ Tiếu), 셀 수 없이 많은 국수와 고기 요리들, 거기에 곁들여 먹는 비아 하노이(Bia Ha Noi, 4.2%), 후다(Huda 4.7%), 라루(Larue 4.2%), 타이거(Tiger 5.0%), 바바바(333 5.3%), 사이공(Saigon 4.9%), 그리고 곳곳의 명품 크래프트 맥주들(4.6~8%). 맥주에 얼음은 선택.
◇ 커피? 까페!
커피 원산지의 맛, 로부스타(robustas) 원두로 만드는 달큰하고 시원한 까페 쓰어다(Cà Phê Sữa Đá), 기다림의 미학 까페 핀(Cà Phê Phin), 집집마다 다른 짜다(Trà đá), 그 자리에서 아보카도를 통째 갈아 만들어주는 카페 보(Cà Phê Bơ), 카푸치노보다는 부드러운 까페 쯩(Cà Phê Trứng), 시원한 까페 드어(Cà phê dừa).
◇ 수다와 소음에 관대한 나라
고요함에 대한 열망. 수다와 새소리에 잠을 깨고, 언제 어디에서도 피할 수 없는 오토바이 소리, 길~고 명랑 발랄한 베트남어, 음소거 하면 유럽.
◇ 하노이와 호찌민, 호찌민과 사이공 사이의 거리
서울 같은 하노이, 이태원 같은 호찌민, 경건한 하노이, 컴사오(KHÔNG SAO) 호찌민, 국가가 만든 호찌민시, 내 마음속의 사이공.
◇ 교육과 의료, 맘껏 선택하는 사회주의 국가
공립학교, 사립학교, 인터내셔널 학교, 제1외국어인 한국어, IB와 AP, 고입과 대입시험, 종합대학과 직업학교, 처음 보는 외제차들, 수영장 딸린 저택과 수상가옥의 공존, 모든 부동산은 국유, 그러나 50년을 넘기는 부동산 점유권.
◇ 공산당, 선거, 정치 그리고 언론
공산당 당대회(5년), 국회의원 선거(5년), 공산당총비서, 국가주석, 총리, 국회의장 선출의 기준은 언제나 소수민족과 여성 할당, 신속한 보도와 비평, 다양성의 근간은 국가주의.
◇ 소수민족, 지방, 도시, 지방자치
63개 Privince, 54개 소수민족, 5대 도시, 철저한 지방자치(누가 누가 잘 통치하나).
◇ 공산주의 경제, 최저임금, 재산권, 극심한 빈부격차
우리는 공산주의로 가기 위해 자본주의를 발달시키는 중.
◇ 종교
언제 어디서나 옹꽁과 옹따오(Ông Công, Ông Táo)에게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우는 사람들, 보살을 닮은 성모, 성모를 닮은 불상, 자생적 힌두교와 수입된 이슬람교, 예수와 부처와 공자와 맹자와 노자와 장자를 한자리에 모시고 외는 프랑스어 주문, 여튼 아들 낳고 잘 살다가 경건하게 죽게 해주세요.
◇ 미술 - 부이쑤언, 레꽁탄, 전쟁미술, 아름다운 락커화
기억의 도구로서의 예술, 프로파간다.
바오닌의 <여전히 날아가는 흰 구름>1은 베트남 중부지역에서 벌어졌던 전투 중 죽은 아들을 30년 만에 찾아가는 어머니의 이야기다. 남북으로 긴 베트남에서 가장 비극적 전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곳이 바로 중부전선이다. 베트남인민군에 의해 A라고 불렸던 이 지역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전쟁의 모든 비극이 일어났다.
1) 베트남 전쟁기 북부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소설집 <그럴 수도, 아닐 수도>(도서출판 아시아, 2021)를 통해 역사가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생각해보시길.
지금은 평화가 찾아온 옛 DMZ, 동하(Đông Hà). 말 그대로 ‘무기를 녹여 보습을 만든’ 지역으로, 후추와 커피가 익어가는 평화로운 땅이지만, 땅속으로 1미터만 내려가도 포탄의 파편이 이곳의 역사를 증거 하기 때문에 논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지금도 밭을 일구거나 건물 기초 공사를 하다가 땅이 푹 꺼지며 은신용 터널을 발견하기도 한다. 케산에 자리 잡았던 미군기지와 근처의 고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며, 제네바 합의로 남북을 분할 했던 북위 17도선을 흐르는 벤허이강(Bến Hải) 위에는 반쪽씩 다른 색으로 칠해진 히엔르엉 다리(Cầu Hiền Lương)가 분단의 역사를 말해준다.
비행기 조종사였던 아들은 아마도 전투기를 몰고 출격했다가 미군의 공격을 받아 추락사했던가 보다. 어머니는 눈으로는 직접 볼 수 없는 벤허이강 위 비행기 안에서 30년간 미루어왔던 아들의 젯상을 차린다. 아들의 시신은 B지역 고향으로 돌아왔을까? 동하 지역 답사코스 중 하나인 전사자 묘역은 인민군들을 일렬로 쭉 묻어두고 하늘을 향해 치솟은 높다란 기념탑으로 그들의 공을 치하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죽는 것은 사람으로서 가장 처참한 일이라 생각하는 베트남 사람들은 그들을 시신으로라도 고향에 돌아오게 하여 현재는 대부분 묘가 비어있다. 온전히 남아있는 “무명 용사의 묘”들이 더욱 쓸쓸하다. 어머니는 아마도 조국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 영웅’으로 추앙받아 어느 정도의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30년을 버텨냈을 것이다.
굳이 1968년에 조직적으로 일어났던 후에(훼, Huế) 진공 작전과 도시탈환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온 국토가 둘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던 시기의 중부지역(오죽하면 A라고 불렀을지) 사람들의 고통은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교전 중 일어난 폭격과 살상행위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고, 극단적 대치상황은 적군에게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민간인의 삶을 간단히 폐기했다. 마을 소개 작전에서 한국군은 늘 뛰어난 성과를 달성했다.
“대미항전과 구국운동은 1945년 8월 혁명 이후 조국수호와 민족해방 투쟁을 벌인지 30년 만에, 그리고 미국에 대항한 지 21년 만에 승리로 매듭지어져 우리 땅에서 행해진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악랄한 통치를 종식시켰다. 또한 그것을 기반으로 전국에서 인민민주주의민족혁명을 완성하고 조국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 우리 인민의 승리와 미제국의 실패는 세계정세에 큰 영향을 미쳐 세계혁명운동, 특히 민족해방운동을 고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베트남 12학년 역사교과서, 2009, p.197)
교과서 개정작업이 진행 중이지만, 지금까지 사용되는 베트남 12학년 역사교과서의 베트남 전쟁 평가 부분이다. 다른 부분도 찾아보았으나 (당연하게도) 교과서 어디에도 양측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학살의 이야기는 없다. 현재 차근차근 검정교과서로의 전환을 진행하고 있는 베트남은 이미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4학년의 개정 사회(역사) 교과서를 발행했고, 현재 12학년 역사교과서 발행을 준비 중이다. 교육과정 개정 초기 책임자 인터뷰를 보면 앞으로 교과서에 당의 과오나 논쟁적인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베트남 전쟁에 적용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밀라이 학살 등 전쟁의 과오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교과서, 그리고 비록 가스통의 위협을 받긴 했었지만 한걸음 나아갔던 한국의 교과서이다. 베트남 전쟁이 세 나라의 역사교육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각국의 시민사회의 성장 정도와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위한 권리 보장 정도가 가라앉은 기억의 역사를 구조해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공산당이라는 절대 권력이 베트남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다양한 지방정부가 거의 완벽한 지방자치제도를 시행하고 국회의원도 500명이나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하고 있지만, 모든 정책의 기조는 공산당이 결정한다.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지만 문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은 늘 대동소이하다. 공산당은 온 국민을 결집하여 오랜 식민지 시절을 끝내고 세계 최고 강대국에 맞서 승리한 것으로 절대적 권력의 정통성을 부여받았다.
통일 이후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등 이웃나라에 비하면 미래의 희망을 더 빨리 찾았으므로, 국민들도 공산당의 권위와 지배력에 순응하고 있다. ‘포스트 차이나’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세계 경제 리더들의 파트너 자리를 차지하는 중이고,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직장을 얻고 공무원이 되거나 사업에 성공하면 부자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공산당은 늘 그들 곁에 있고, 받아들이면 삶이 단순하고 간편하고, 안전해진다. 어떤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도 정해져 있다.
“모든 시민은 군인이다.”라는 정신으로 시의 모든 시민이 시 정부와 협력할 것을 요청합니다. 각 가족, 주거 그룹 및 이웃은 전염병에 대항하는 요새입니다 : 전염병의 진화에 당황하지 않고 항상 의식을 높이고 자발적으로 보건부의 5K 조치를 준수하며 특히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자발적인 건강 신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완전히 이행하며, 기관 및 지역 사회의 전염병 예방 및 통제 활동에 책임감 있게 참여합니다.
(2021.5.30. 호찌민시인민위원회,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락다운을 발표하며)
코로나를 이기기 위해 군인정신이 필요하고 우리의 삶을 요새화해야 하는 곳, 이곳이 베트남이다. 각 도시의 거리들은 영웅의 이름을 따 부르고, 곳곳에는 저항의 상징이었던 전사의 동상(쩐흥다오부터 호찌민까지)을 중심으로 대로가 뻗어 나간다. 박물관과 미술관 서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국난극복의 영웅들과, 그들과 함께 했던 동지들, 분신과 같은 무기가 있고 전쟁에서 노획된 전투기와 헬기는 박물관 마당의 필수 전시품이다. 그 투쟁의 역사를 드러내며, 파리의 향기가 감돌던 남부의 도시 Sai Gon은 1976년에 TP.HCM이 되었다.
서울의 전쟁기념관이라는 용어에 불편함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호불호를 떠나서, 박물관의 건립취지와 건립당시의 국가적 전쟁서사를 정확하게 표현한 점에서 참으로 맞춤인 이름이라 하겠다. 호찌민의 ‘전쟁증적박물관’을 한국어로 어떻게 적는가를 두고도 사람들마다 약간 입장이 다르다. 그 이름은 차치하고 박물관을 찬찬히 살펴보는 일은 필요하다. 전쟁박물관 뿐 아니라 호찌민시립박물관의 근현대실은 남부해방투쟁의 역사를 매우 정성들여 보여준다. 사실 베트남은 국토 전체가 전쟁기념관인 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전쟁기념관에 들어와 홀로그램과 음성지원, 가상현실로 전쟁의 유산을 체험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국가가 권위를 부여한 공식적 역사해석이 현실 정치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여실히 알 수 있다.
수 천 년의 역사가 지나는 동안, 베트남 인민은 국가를 세우고 유지하기 위하여 근면하고 창조적으로 일하고, 용감히 투쟁하며, 애국·단결·인의(仁義)·견강(堅强)·불굴의 전통을 단련하여 베트남 문명의 토대를 건설하였다. 1930년부터, 호치민 주석에 의하여 창립되고 단련된 베트남 공산당의 영도 하에 우리 인민은 인민의 행복, 민족의 독립·자유를 위하여 고난·희생으로 가득찬 오랜 투쟁을 진행하였다. 8월 혁명이 성공하고, 1945년 9월 2일, 호치민 주석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하였으며, 이는 곧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다. 전 세계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온 민족의 의지와 힘으로, 우리 인민은 민족해방투쟁, 국가 통일, 조국 수호의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였으며, 국제적 의무를 이행하고, 도이머이(đổi mới) 사업에 역사적 의의를 두고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였으며, 국가를 사회주의로 이끌었다.
베트남 인민은 사회주의에 이르는 과도기 동안 국가건설의 강령을 체제화하며 1946년 헌법, 1959년 헌법, 1980년 헌법 및 1992년 헌법을 계승하여 인민의 부, 강국, 민주, 공평, 문명의 목적을 위하여 이 헌법을 수립, 시행 및 보호한다.
(베트남 헌법 전문, 2014 개정)
수 천 년의 역사가 지나는 동안, 베트남 인민은 국가를 세우고 유지하기 위하여 근면하고 창조적으로 일하고, 용감히 투쟁하며, 애국·단결·인의(仁義)·견강(堅强)·불굴의 전통을 단련하여 베트남 문명의 토대를 건설하였다. 1930년부터, 호치민 주석에 의하여 창립되고 단련된 베트남 공산당의 영도 하에 우리 인민은 인민의 행복, 민족의 독립·자유를 위하여 고난·희생으로 가득찬 오랜 투쟁을 진행하였다. 8월 혁명이 성공하고, 1945년 9월 2일, 호치민 주석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하였으며, 이는 곧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다. 전 세계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온 민족의 의지와 힘으로, 우리 인민은 민족해방투쟁, 국가 통일, 조국 수호의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였으며, 국제적 의무를 이행하고, 도이머이(đổi mới) 사업에 역사적 의의를 두고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였으며, 국가를 사회주의로 이끌었다.
베트남 인민은 사회주의에 이르는 과도기 동안 국가건설의 강령을 체제화하며 1946년 헌법, 1959년 헌법, 1980년 헌법 및 1992년 헌법을 계승하여 인민의 부, 강국, 민주, 공평, 문명의 목적을 위하여 이 헌법을 수립, 시행 및 보호한다.
(베트남 헌법 전문, 2014 개정)
종전 46주년, 구조된 기억으로서의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 사회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까?
(1) 무기와 권력의 미학
호찌민의 시립미술관 건물은 정말 아름답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혈혈단신 중국 복건성에서 건너와 인생역전을 일구어냈던 Huỳnh Văn Hoa(후인반화, 黃文華, 황문화)가 프랑스 궁전을 본 따 만든 저택이다. 호찌민시 최초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4층 저택은 사방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고층건물이었다.
이곳의 메인 전시는 전쟁 현장에서 그려진 스케치화다. 미술관에는 총 3461장의 스케치화가 보존되어 있는데, 남부의 전쟁터에서 그려진 것들이다. 모델은 젊은 병사들과 총검이다. 이들이 싸우고, 훈련하고, 농사짓고, 어울리던 장면들이 가벼운 연필선과 수채물감으로 표현되고 있다. 해사한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꽃을 입에 문 그림들은 애잔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총과 꽃. 서로에게 역설적인 두 피사체는 모두 젊은 병사의 몸과 마음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그럴 수 없이 어울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군에 가야하고, 대학생은 단기 입소하여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프로파간다가 있을까 싶다.
아오자이와 연꽃과 총검과 호찌민. 이 아름다운 조합은 어디에나 보인다. 그리고, 공산당으로 수렴한다.
(2) 어머니(여성)에 대한 전형성
‘어머니 영웅’이 있다. 전쟁에 아들, 딸을 내보내고 후방에서 승리를 위해 노력했던 어머니들에게 직접 영웅 칭호와 훈장을 수여하고 예우를 갖춘다. 총검을 메고 전쟁터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젊은 어머니, 전쟁터로 떠나는 아들에게 강인한 눈빛으로 손을 흔드는 늙은 어머니. 길게는 100년이 넘는 저항의 시기에 어머니의 국가적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힘든 시기에도 아이를 낳아 튼튼히 길러 조국을 위해 떠나보내며, 보내고 나서는 후방에서는 주둔하는 부대에게 밥을 해먹이며 어머니의 역할을 해냈다.
이런 여성의 역할은 베트남에서 체계적인 제도이면서 도덕적 책무 같은 것이어서, 북베트남군이든 남베트남군이든 마을을 점령한 군인들에게 끼니와 정서를 모두 보듬어 안는 역할을 했다. 이동 명령에 급히 떠난 군인들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감사를 표했다. 어머니의 역할이 다층적이었음은 추측할 수 있다. 그런 ‘어머니 상’은 베트남 사회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아들을 낳아야 하고, 잘 길러야 하고, 교육을 위해 필요한 재정을 충실히 확보해야 하고, 살뜰히 보살펴야 한다. 그것이 어머니이다. 베트남의 어머니들과 여성동맹은 여러 차례 호찌민의 찬사를 받았고, 그이들의 역할은 강화되었다. 전사의 어머니였다.
동시에, 젊은 여성은 아름다워야 한다. 1920년대부터 몸에 달라붙어 여성의 신체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한 아오자이는 베트남 여성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사시사철 원색인 베트남에서 흰색 아오자이는 지금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순결과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베트남의 많은 대학들이 흰색 아오자이를 여성용 교복으로 채택하고 있다. 3월 초 아오자이 위크에는 공 기관 여성 직원이 아오자이를 입도록 권장된다. ‘베트남’의 이미지를 위한 여성의 신체 전시 전략이랄까. 타자의 눈으로 여성의 몸을 보게 만든다. 프랑스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오리엔탈리즘이 아직도 남아있는 느낌이다. 1960년대 사이공을 활보하는 여성들은 현대의 패션 화보에서 걸어 나온 듯하다. 서구의 자유로운 공기가 만져지는 사진이 많다.2)
베트남에는 여성의 날이 두 번이다.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과, 쯩 자매부터 베트남 여성연합까지 투쟁의 선봉의 선 여성들을 기리는 10월 20일 베트남의 여성의 날이다.
2) 패전 후 미군점령기의 일본 모습을 담은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민음사, 2009)와 흡사한 풍경이 많다. 일제강점기의 경성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까. 서방의 점령은 대대로 전통의 억압을 견디던 여성에게는 또 다른 종류의 해방을 경험하게 했다.
(3) 베트남과 미국과 한국
베트남은 미국에 사과하라고 하지 않는다. 한국에게는 물론이다.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었고, 승리한 전쟁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 필요치 않다는 입장인 것 같다. 미국과 베트남은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에 의해 오염된 토지를 정화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다. 미국이 기술력과 자본을 대고 베트남 정부가 이를 받아 진행하는 형식이다. 미국은 에이전트 오렌지로 인해 신체적 장애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지원을 하지는 않고 있다. 베트남 정부도 전쟁을 직접 겪은 군인들에게는 치료비를 지원하고 있지만, 유전으로 인한 피해는 지원하고 있지 않다.
한국과는 상호 필요에 의한 활발한 경제협력이 기업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의 기업은 다양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기술을 전수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하고 있으며 베트남의 주요 수출국이기도 하다. 한국 기업에게 베트남은 아직도 값싼 노동력이 무궁무진한 기회의 땅이다.3) 코로나 이후 타격이 크기는 하지만 한국인은 베트남 관광산업의 주요대상이기도 해서 일반 관광객에게는 바다를 낀 리조트가 인기였고, 참전 군인을 대상으로 한 ‘전적지 투어’도 유행이었다. 양쪽 모두 ‘과거를 닫’는 이유이다. 4)
3) 2020년 베트남 국가임금위원회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어려운 경제환경이 지속되는 가운데 임금을 올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며 2021년 최저임금을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노동총연합 대표는 표결에서 기권했고 베트남상공회의소는 동결에 찬성했다. 전국을 4개 권역으로 나누어 적용하는 베트남 최저임금은 2021년 현재 월 307만동~442만동(한화 약 15만4천원~22만2천원) 수준이다.
4) 그러나 최근 한국기업들이 베트남의 학교 현대화를 지원하거나 한베평화재단의 장학사업에 동참하는 등 변화의 조짐은 생겨나고 있다.
(4) 베트남과 중국
베트남에게 과거의 적이었던 미국과 한국보다 더 두렵고 골치 아픈 나라는 점차 위력을 떨치고 있는 중국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중국과 벌인 전쟁의 여파이며 고대부터 이어져온 피지배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현재진행형인 영해분쟁은 가장 심각한 문제다. 다낭 미케비치 북쪽으로 가면 호앙사(Hoàng Sa)가 베트남의 영해임을 증거 하는 박물관이 있다.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독도전시관 수준의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양국과 서양의 고지도, 각종 문헌 자료들, 프랑스와 남베트남이 중국에 맞서 호앙사를 지키기 위해 치뤘던 전투와 그 주인공들 사진이 보여준다.
영해분쟁이 얼마나 당면한 문제인지 자신들이 ‘괴뢰정부’라며 부정하는 프랑스와 남베트남 정부의 투쟁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는다. 중국으로부터의 밀입국자 문제도 주기적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등장하여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운다. 역사교과서에서도 가장 이슈가 되는 서술은 중국과의 역사분쟁, 영토분쟁, 영해분쟁이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고 경제정책도 별다르지 않아5) 이들이 갖는 경계심은 매우 의외지만, 베트남에게 안팎으로, 어쩌면 중국에게도 필요한 것임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5) 주지하다시피 중국도 덩샤오핑 시기부터 개혁개방노선을 채택했고, 베트남의 도이머이 정책(1986)과 비슷한 시기인 1987년에 ‘사회주의초급단계론’을 내세우며 생산력 발전, 종합국력 강화, 인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국가적 의무로 내세웠다. 이를 이은 시진핑의 ‘신시대 중국 특색사회주의론’은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5) 코로나19 백신 펀드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했던 일이다. 일당독재국가, 절차적 제도적 민주주의는 철저히 지켜지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측정하기 어렵다. 권위와 정통성은 있지만 발언권과 정책결정권이 소수에게 있다 보니, 이웃 미얀마의 일이 결코 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민주주의는 결코 완성되지 않으니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다. 한 사회의 민주주의 형성 정도 - 제도적인 면과 더불어 사회의 공기에서도 - 는 한 개인의 삶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지, 세월에 묻어버린 목소리를 얼마나 구조해낼 수 있는지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한 언론사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증거자료와 함께 제기했을 때, 두 나라 정부에는 어떤 소동이 일어났을까? 베트남 사람이라도 중부에 살지 않으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잘 알기가 어렵다고 한다. 중부에서도 전해져오는 이웃의 이야기들로만 접해온 경우가 많았는데, 한베평화재단의 지속적인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통해 현지 언론에도 보도되고, 장학사업과 현지 대학생 평화캠프 등으로 연결되어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 경제가 살아났습니다. 대한민국의 부름에 주저 없이 응답했습니다. 폭염과 정글 속에서 역경을 딛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이국의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생긴 병과 후유장애는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채입니다. 이제 국가가 제대로 응답할 차례입니다. 합당하게 보답하고 예우하겠습니다. 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2017.6.6.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난 6월 9일에 베트남 외교부 대표는 주 베트남 한국 대사관 대표와 엄중한 교섭을 진행하였습니다. 베트남은 모든 나라와의 우호 관계 발전을 희망하며 그중에는 한국도 포함됩니다. 양국의 지도자는 ‘과거를 닫고 미래를 열자’는 것에 인식을 함께 한 바 있습니다. 우리 베트남은 한국 정부가 베트남 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양국의 우호 협력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발언과 행동을 삼가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2017.6.12. 문재인 대통령의 현중일 추념사에 대한 베트남 외교부의 공식 입장)
위의 두 문단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과 베트남 두 국가의 공식 입장을 잘 보여준다. 두 정부가 물밑으로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감지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공식 발언을 준비하면서 누구를 가장 중심에 둘까를 셈한 정치적 계산도 엿보인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는가, 얼마만큼 진실을 공개하고 여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가, 교육 현장에서 역사적 사건을 다루며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의 폭을 넓혀가는 데 시민사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두려움 때문에, 정치적 보복 때문에, 사회적 비난 때문에 감추어졌던 목소리를 들추어내는 데에는 시민사회의 몫이 크고, 그 다음 그것을 연구하는 것은 연구자들의 몫이고, 거기에서 타당한 근거와 논리성이 확증되었다면, 그것을 교과서에 담아내고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것(‘강의하는 것’이 아니다)은 교사의 몫일 것이다. 그 바탕에는 한 사회의 민주주의 발달 정도가 있고 각 단계에서 중심이 되는 교사, 연구자, 시민사회의 협력도 필수 요소이다. 이 프로세스와 주체 중 어느 하나가 누락되는 순간 한 사회의 역사교육은 왜곡되거나 무모해지거나 섣부르게 된다.
공공역사, 역사에 대한 사회적 기억, 미래를 향한 역사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을 절대 가볍지 않고, 감추어진 기억을 구조하는 데도 제 역할이 있다. 언론을 통해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알려진 지 22년, ‘미안해요 베트남’을 넘어서, 베트남 전쟁을 통한 역사교육은 무엇을 더 이야기할 수 있을까?
(1) 들리지 않는 목소리 - 증오가 위령이 되기까지
전쟁이 끝나자 중부지역 마을 곳곳에 증오비가 세워졌다. 한날, 한시도 잊지 못하고 몸과 마음에 새겨진 증오를 비석에 옮겨 적었다. 학살당해 불에 태워지고 짓뭉개진 가족과 이웃들의 이름도 한자 한자 태어난 해의 숫자와 함께 새겨 넣었다. 베트남 정부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로 희생된 사람은 약 5천 여 명. 종전 후 5개월 만에 세워진 미군범죄전시관(지금의 호찌민 전쟁박물관), 1978년에 설립된 밀라이 학살 기억관을 비롯해 학살이 있었던 마을들에 크고 작은 기억물과 증오비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도이머이(Đổi mới)정책이 선언된 1986년을 전후해 ‘증오비’는 ‘위령비’로 이름이 바뀌었고. 공식 위령 행사도 각 마을 단위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한다” (베트남, 1986)
“이 불행한 사건의 역사적 매듭을 짓고 화해와 협력으로” (대한민국 제주, 2003)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해결로서의 합의” (대한민국, 2015)
증오는 무사히 위령이 되었을까? 용서와 평화의 전제조건은 무엇일까?
(2) 응우옌티탄(Nguyễn Thị Thanh)과 쩐또응아(Trần Tố Nga) – 그들 곁에는 누가 있었는가
퐁니퐁녓 마을 출신인 응우옌티탄이 한국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웃옷을 들춰 길고 깊이 패인 상처를 보여줬다. 여성이 자신의 웃옷을 들춰 깊은 상처를 보여주는 행위는 흔히 보기 힘들다. 그것은 오랫동안 묻어둔 기억을 자신과 사람들 앞에 다시 끄집어내는 일이고 또한 사회통념상으로도 여성으로서 치욕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공인된 역사에서는 부정당한 기억을 온몸으로 증언하기 위해 감수하는 일이다. 그 곁에는 한국인 연구자 구수정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 시기에 교사와 기자로 일했던 쩐또응아와 그의 딸, 손자들은 고엽제의 영향으로 암을 비롯한 다양한 면역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프랑스에 살고 있는 쩐또응아는 고엽제를 만든 미국의 여러 화학회사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했고, 소송을 제기했다. 그의 곁에는 프랑스인 변호사 윌리엄 부르동이 있었다. 우리나라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 곁에 윤미향이 있었듯이. 그리고 구수정과 윌리엄 부르동과 윤미향의 곁에는 우리가 있었고, 지금도 있다.
방관자(By- Stander)와 동참자(Up- Stander)의 이야기, 뜻하지 않았던 역사의 피해를 짊어진 개인의 곁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어떨까? 잔인한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정의를 위해 나섰던 사람들의 이름은 안도감을 준다.
(3) 제노사이드와 데모사이드 – 수치화된 죽음 너머
· 데모사이드(Democide)
개인 간의 살인과 구분되는 정치권력의 ‘명령’ 혹은 ‘방조’에 의한 살인 행위
· 195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에서 일어난 데모사이드(Democide)
4,000명~10,000명(미군), 약 3,000명(한국)
57,000~284,000(남베트남), 131,000~302,000(북베트남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集團虐殺), 집단살해(集團殺害) 또는 제노사이드(genocide)는 그리스어로 민족, 종족, 인종을 뜻하는 Geno와 살인을 뜻하는 Cide를 합친 말이며, 고의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민족, 종족, 인종, 종교, 동일한 특성을 지닌 특정한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제거하는 학살의 한 형태
“살육자는 숫자들 뒤에 숨어 있다. 막대한 죽음의 숫자를 읊조리는 것은 익명성의 흐름에 숨어버리는 일이다. … 개별적인 삶을 부수적으로 다루는 숫자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은 개인을 말살하는 일이다. … 인간의 마음을 가진 우리는, 그런 숫자들을 사람들로 돌려놓아야 한다. (티머시 스나이더, <피에 젖은 땅> 715쪽~718쪽)
개인의 삶의 모습을 복원하고 연루된 사람들의 죽음과 삶에 더 세밀한 눈길을 주어야 한다. 죽어야 했던 사람과 죽여야 했던 사람에 대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죽음을 수치화하고, 많고 적음을 따져 죄악의 우열을 가릴 수 있는가?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있는가? 국가와 집단에 의해 짓이겨진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절대 선인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4) 누군가의 해방, 누군가의 패배 - 개인의 운명은 누가 결정하는가?
1975년 3월 29일에 다낭을 해방시킨 북베트남군과 비엣민은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진군했다. 그들이 지나는 마을마다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지만, 남쪽으로 갈수록 그들을 피해 고향을 떠나는 인파도 줄을 이었다. 4월 29일 미국대사관 옥상에는 마지막 미군 헬기가 도착했고 탈출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사이공 전체가 아비규환이었다. 사이공과 가까운 붕따우에는 배를 타고 남베트남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진 재산을 모두 다이아몬드로 바꿔 옷깃에 꿰매 입은 사람들도 있었고, 겨우 배삯을 마련한 가난한 천주교도 가족들도 있었다. 이들은 해안 가까운 성당에서 가족의 안위를 비는 마지막 기도를 하고 배편을 구하는 대로 고국을 떠났다.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배는 가라앉을 듯 말 듯 모든 것을 파도에 맡겼다.
누군가의 해방은 또 누군가의 패배였다. 그 양편의 사람들의 운명을 가르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왜 그 길을 선택했을까? 선택한 것인가, 닥친 것인가? 전쟁이라는 상황은 우리에게 어떤 운명을 만들어낼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5) 전쟁은 가난한 이들에게 더 잔인했다 – 베트남과 미국과 한국
베트남 전쟁이 더 치열해질수록, 전쟁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흐려질수록, 더 많은 베트남 농민의 자식과 미국의 이주배경 가정의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왔다. 한국의 병사들은 대부분 기술을 배우고 안정적 급여를 얻기 위해 베트남으로 향했다. 남북 베트남 간부들의 자녀들은 러시아나 프랑스,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세 나라의 가난한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고 극한 상황에 내몰렸다. 치열했던 막바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트라우마와 고엽제 후유증, 그리고 명분 없는 잔인한 전쟁의 수행자라는 비난까지 뒤집어써야 했다. 전쟁의 계급성, 차별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베트남 전쟁이다. 한국의 징병제를 모병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더 많은 고려가 필요하다. 전쟁의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다.
(6) 이행기 정의와 회복적 정의 –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용서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행기 정의’라는 말이 있다. 한 사회가 점차 민주화되고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과거에 겪었던 고통스럽고 부당한 역사들을 들춰내고 재평가하고, 정의에 수렴하도록 바로잡는 일이다. 한국의 경우 2005년에 처음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한 과거사 진상규명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피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나 6.10 민주항쟁, 4.3사건 등의 피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국가범죄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 사과와 함께 피해자 지원, 국가기념일 지정, 민주화운동 유공자 지정 등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부작용, 예를 들면 정의와 희생을 판단하는 주체가 국가로 한정되거나 피해의 정도에 따라 위계를 만들어 서로 반목하거나, 사회적 인식과 교육이 함께 가지 못해 생기는 역사부정이 끊임없이 발흥하긴 했지만, 그래도 ‘억울한 죽음’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말 못하는 고통’을 수면 위로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서 가진 의미는 매우 크다.
그러나 이행기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 대한 불만 또는 그 결과로 불거진 부작용들을 보듬어 사회의 연대와 인식전환, 치유와 통합으로 나아가는 일은 피해자와 가해자, 사회 전체에게 꼭 필요한 일인데, 최근 들어 많이 회자되는 ‘회복적 정의’가 그 내용을 담보한 정의개념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자국에서 일어났던 인종차별과 그로 인한 인권 말살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운영했던 ‘진실화해위원회’는 좋은 예가 된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와 스토리텔링, 배보상, 그에 연관된 가해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가해 인정 절차, 그리고 화합을 위한 사면이 이루어졌다. 가해자를 철저하게 처벌하지 못했다는 것이 남는 문제이긴 하지만, 숨겨져 있었던, 그리고 개인이 해결해야 했던 피해 증명을 국가가 나서 만천하에 공개된 자리에서 진행하고 기록에 남겼다는 것은 앞으로의 역사에 큰 이정표가 될 수밖에 없다.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를 밝혀 역사에 기록하고, 처벌, 배・보상, 용서를 하고, 사회적으로 함께 인식, 연대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역사부정과 사회정의에 대한 백래시 현상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가스통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 고엽제 전우회 할아버지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가해국의 위치에 선 우리가 베트남의 이행기 정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일상과 학교 안에서 회복적 정의는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은 왜? 베트남 전쟁을 가르치려 하는가?
지난 번 유용태 선생님의 강의에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눈앞의 대상을 인식 한다”는 멋진 말을 해주셨다. 역사교육의 목적은 낱낱의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고하고 맥락을 파악하여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이해해서 그들이 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를 재구성하는 데 있다.
베트남 전쟁이라는 길고도 복잡하고 고통스러웠던 역사는 ‘오늘을 의제화 하려는’ 역사교육의 목적에 부합하는 내용을 많이 가지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베트남 정부도 대한민국 정부도 그것의 일부를 공식적 기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베평화재단과 한국 시민들의 힘으로 서서히 수면 위로 끌어올려지고 있는 기억들을 교육적으로 어떻게 구성하여 교실에서 이야기할 것인가가 역사교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이제 ‘진실을 알리겠다’가 아니라 다른 목적과 방향으로 다가서 보길 권한다. 교사는 교육과정의 재구성자가 아니라 구성자다. 그렇다면, 한 가지 사안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고 무엇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구성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다. 시민사회와 책, 동료교육자들이 좋은 벗이 될 것이다.
응우옌티탄과 쩐또응아의 이야기에 귀기울여보는 건 어떨까? 그들 곁에 있었던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도 연대하는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르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길원옥 김복동 할머니가 단지 과거의 피해자가 아니라 평화와 인권을 위한 여성운동가가 되었던 것처럼, 저 두 베트남 할머니가 인권운동가로 살아가는 모습을 함께 보는 것도 좋겠다. 전쟁이란 자주 개인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저질러지며, 전쟁이 장기화되었을 때 고통은 계급을 따라 순차적으로 차오른다는 것도 소설과 증언을 통해 접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 <고지전>에서 정전협정 발효 시점 공지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하는 남한군과 북한군 지도자의 모습과 대비하여 참전군인의 인터뷰를 읽어보는 것도 전쟁에서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관계를 회복하는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증오비의 내용을 함께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증오비가 연꽃그림으로 덮이게 되었던 여러 사연을 통해 베트남 정부의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한다’는 모토를 함께 숙고해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의 사건만큼 현재 두 나라 사람들의 삶의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것도 권장한다.
얼마 전 어떤 자리에서, 20대 학생들이 취업이나 공무원 시험 등에서 5.18 유공자 자녀들이 가산점을 받는 것에 대해 ‘불공정’하다고 느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독립유공자나 6.26참전용사의 자녀가 ‘국가보훈유공자 가산점’을 받는 것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희생당한 분들에 대한 인정은 그리도 어려운 걸까?
앞에서 말했던 ‘이행기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연구자와 조사자, 전문가들의 성과는 컸으나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교과서와 수업에서 일제강점기 역사는 그토록 처절하게 가르치면서 민주정부를 가지지 못한 시절에 겪었던 고통은 세밀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도 원인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 공식적인 조사와 인증을 받지 못한 시절이 길었으니 공식적 역사교육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기간도 너무 길었다.
이제 벌써 진실화해위원회 1기의 성과를 토대로 많은 사건들의 진실이 밝혀졌다. 기록이 방대하고 증거자료도 많고, 생존자들도 많다. 이 자료들을 연구 분석하여 교육과정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빼앗겼을 때 겪었던 개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언제든 민주주의는 무너질 수 있으니, 우리들 모두는 늘 참여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뻔한 내용도 가르치고 이야기해야 한다. 이 땅에서 셀 수 없이 저질러졌던 민간인 학살과 국가폭력도 ‘개인의 삶’ ‘민주주의’ ‘사회적 연대’라는 중심 개념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래서 애도해야 하는 것은 애도할 수 있게, 비판해야 하는 것은 비판할 수 있게, 참여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은 그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물론 이 내용의 구성은 주입식 설명이 아니라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고민하고 회의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교사의 치밀한 디자인에 바탕 해야 한다.
역사적 기억을 우리 사회 안에서, 내가 발 디딘 사회에서, 어떻게 유의미하게 구성해내고 교육할 것인가가 우리 사회에서 수면 아래 가라앉아 버린 기억을 구조하는 역사교사의 역할이다. 국가가 구성해준 ‘공공 기억’을 금과옥조처럼 지켜 가르치던 오랜 역사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시민사회, 학계와 협력하여 우리사회의 ‘공공 기억’을 함께 구성해내고 가르쳐야 한다. 베트남의 ‘공공역사’에서는 지워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구조해내어 들리게 하는 일도 그중 하나이다. 가해국의 역사교사로서 그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