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야기 >> 중학교 세계사 수업의 고민들
≫ 이재호(서울 개운중, 편집부 에디터)
편집자주] 2015 교육과정 개정으로 중학교 세계사 수업의 고민을 호소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아지셨습니다. 이전 교육과정에서 의도하였던 한국사-세계사의 연계 가능성은 옅어지고, 내용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세계사 교육의 어려움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만, 어려워진 내용을 학생들의 삶과 어떻게 연결 지을 수 있을까가 최근의 가장 큰 도전 과제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재호 선생님께서 서울 성북과 강북 역사교사 모임에서 세계사 수업에 대한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가기 위해 논의되었던 이야기들을 지면을 통해 공유해주셨습니다.
이재호 선생님은 “이 진단은 저희 모임의 경험과 대화에서 나온 지엽적인 결론입니다. 그리하여 오류투성이일 수 있습니다만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곤혹의 지지부진을 해결할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용기 내어 글을 써 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글을 넘겨주셨습니다. <역사교육>은 여러 선생님들의 고민들이 쌓여 더 나은 수업 방안이 만들어질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더 나은 세계사 수업을 위하여 <역사교육>의 지면을 활용하고 싶은 전국 역사 선생님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편집부 메일 : hisedu_journal@naver.com)
지난 세월의 씌여진 것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엮어 읽으면서,
해묵은 강박관념들 만날 수 있었다,
이 길은 돌아 돌아 나올 수 없는 길
시는 스스로 만든 뱀이니 어서 시의 독이 온몸에 퍼졌으면 좋겠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은 곤혹의 지지부진이다.
이성복 시인, 『아 입이 없는 것들』 中 -
‘선생님 어떡해요, 역사 너무 어려워요. 1도 이해가 안돼요.’ 시험기간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엄살입니다. 하지만 그 엄살에 대한 대응이 쉽지가 않습니다. 왜일까요? 오랫동안 보아왔던 너무 흔한 그 한마디에 마음이 이토록 얼어붙고, 곤혹스러운 것은?
‘세계사를 아이들이 너무 어려워합니다. 열심히 하곤 있는데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시간은 부족하고, 내용은 많고, 아이들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며칠 전 지역(성북강북 수업나눔교사단) 역사 선생님들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입니다. 정도의 차이, 방향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곤혹스러운 표정들이었습니다. 어쩌면 흔한 엄살일 수도 있습니다. 지난 세월을 되짚어 보면 중학생에게 역사란 늘 그와 비슷하게 곤혹감을 주었고, 그러한 중학생을 교육하는 역사 선생님에게 그 곤혹감은 숙명과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날 그 모임에서 그 한마디는 왜 그토록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특별한 곤혹으로 다가왔을까요?
그날의 곤혹의 유일한 위안은 모두가 곤혹스러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차차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왜 더 특별히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곤혹의 지지부진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지난 세월의 것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한국사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살며시 피해오거나, 살포시 즈려밟고 갔던 세계사 교육의 곤혹들, 그것을 엮어 읽으며 해묵은 강박관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강박관념들을 되짚어 보면 ‘특별히’ 중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성, 인간의 경험이 만든 공통성과 보편성,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매개하는 공감, 공감을 만들어 내는 서사와 가치의 담론들이었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세계사 교육을 곤혹스럽게 하는 핵심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바라본 아이들이 부딪히는 첫 번째 곤혹감은 공간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그것은 교사가 부딪히는 곤혹감이기도 합니다. 지난 경험들을 되짚어 보면, 역사 수업에서 시간성이라는 역사의 준칙에 압도되어 공간성을 소홀히 다루어 왔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공간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다원적으로 진행되는 세계사의 시간성을 이해하기는 학생들에게 아주 어려운 과제가 되어버렸습니다.
두 번째 곤혹감은 역사교육이 추구해왔던 공통성, 보편성에 대한 관성입니다. 세계사 교육은 ‘다름’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다름’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취해왔을까요? 공통성과 보편성을 이해하는 수단, 혹은 그 경로로서 ‘다름’을 살펴봤던 것은 아닐까요? 공통의 서사, 공통의 담론으로 수렴되는 세계사, 그것을 조금 더 풍성하게 하는 요소로서 ‘다름’을 다루어 온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공통의 서사로 수렴되지 않은 ‘다름’들, 즉 백화점식 진열의 사실들이었습니다. 보편성과 공통성으로 수렴되는 다름보다, 다름 그 자체로서의 다름을 지닌 서사가 훨씬 많은 세계사, 우리의 출발점과 도착점은 공통성과 보편성이 아닌 다름 그 자체가 돼야 하지 않을까요?
세 번째 곤혹감은 공감입니다. E. H 카가 정의한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을 아마도 역사교사라면 준칙처럼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화이며, 대부분 역사교사라면 그에 대해 동의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대화 할 것인가에 대해 여전히 낯설어합니다.
현재의 ‘대화’는 과거에 대한 공감에서 출발합니다. 공감을 토대로 사유하고, 사유된 경험을 표현하고, 표현을 통해 생각을 교류하며 대화는 완성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리고 공감을 어떻게 불러일으킬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어떤 공감이 교육적으로 유의미하며 가치 있는가에 대해 충분히 성찰하고 있지 못한 듯합니다. 그러하기에 대화는 겉돌거나, 의미 없는 행위로만 남기 마련입니다. 특히 낯섦으로 가득한 세계사의 ‘공감’의 통로 찾기란 여전히 곤혹스럽습니다.
이 글에서는 저희가 느낀 곤혹과 곤혹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 일련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시인 이성복이 ‘시란 스스로 만든 뱀이니 어서 시의 독이 온몸에 퍼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듯이 역사교사에게 역사 또한 그러한 듯합니다. 시에 대한 곤혹은 시를 통해서 해결해야 하듯, 역사 교육에 대한 곤혹은 역사 교육의 실천을 통해서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역사란 스스로 만든 뱀이니 어서 역사의 독이 온몸에 퍼졌으면 좋겠다.’ 저에게도 그 독이 퍼졌으면 합니다.
(1) 공간을 이해하기
“각각의 사회는 저마다의 공간을 생산한다.”
“공간의 생산과 그 생산 과정이 존재한다면, 거기에 반드시 역사도 존재 한다”
앙리 르페브르 『 공간의 생산』 中 -
한 사회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데, 공간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동시에 하나의 사회와 그 사회의 역사는 독특한 공간을 생산하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공간 연구에 천착했던 역사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과 그 생산의 과정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역사도 존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그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공간의 특징과 공간이 생산되는 과정을 이해할 필요성을 제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공간’이 만들어 내는 ‘다름’으로 충만한 세계사의 지역 서사, 시대 서사는 ‘공간’에 대한 필수적인 이해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 교육에서 ‘공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여전히 난망한 상황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지식을 창조하는 시대입니다. 그것은 공간을 이해하는데 한계로 부딪혔던 물리적 조건들이 극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4차 산업의 근간이 되는 공간정보가 없었다면 4차 산업의 근간이 되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현대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공간’에 접근하고, ‘공간’을 이해 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의 토대는 충분히 다져져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 그리고 현재의 역사교사는 ‘공간’에 대한 이해, ‘공간정보’를 다루는 방법에 미흡한 것이 현실인 듯합니다. 물론 그것은 지극히 저희 그룹에 대한 성찰의 내용입니다. [이미 충분히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는 전국의 선생님들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희 모임은 이러한 곤혹을 해소하기 위해 몇 가지 노력을 시도했습니다. 세계사 수업에서 처음으로 부딪히는 난감함은 학생들의 지리 지식의 부재입니다. 영국이 섬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아이들, 인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아이들, 독일과 프랑스가 옆에 있는 나라인지 몰랐다는 아이들. 흔히 듣는 나라들이 이러할 진데, 낯선 서아시아, 동남아시아의 위치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차이를 암기하지만, 아이들은 위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위치의 파악이 어려우니, 공간이 생산하는 지역의 특징과 그 연장선에 있는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난망할 뿐입니다. 그것은 이슬람의 역사를 배울 때 여실히 증명됩니다.
그래서 세계사 수업을 할 때 지리정보를 확인하는 절차와 활동을 연계하였습니다. 구글 ‘나의 지도’를 이용하여, 지리적 특징을 경험적으로 확인을 하고, 공간의 특징이 생산하는 역사적 사실을 조사하는 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온라인 수업과 오프라인 수업의 연계과정은 이 수업을 좀 더 탄력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문명의 발원지들을 지도상의 공간 정보를 통해 지각하고, 공간이 생산하는 역사의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은 역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길을 터주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2학년 세계사에서 문명의 발생 부분을 구글 맵스를 통해서 진행하였고, 3학년 세계사 시간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 상황을 구글 맵스를 통해 표시하고,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문제점들과 식민지 저항운동의 사례를 구글 맵스에 조사하여 표시하고, 살펴보게 함으로써 당시 시대상황을 활자가 아닌 지도상의 관계를 통해 살펴볼 수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이고, 공간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유의미하게 역사 교육과 연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중세 유럽의 공간과 공간의 특징이 만들어 내는 중세 유럽사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 ‘국가’보다 ‘지역’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의 정서를 공간과 역사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법, 다민족, 다언어 국가의 특징을 공간의 변화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법, 공간의 변화가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생산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방법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중학생들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연구하고, 나누고, 논의할 예정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곤혹감을 해소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의 도전입니다.
(2) ‘다름’을 이해하기 [타자성과 연대성]
타인의 얼굴은 환원되지 않는 차이인데,
나에게 부여되고 나에 의해 이해되며
나의 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에 뜻하지 않은 출현을 일으킨다.”
- 레비나스 타인의 얼굴 中 -
‘헤어지는 길에, 헤이만 선생님은 본인이 버마족 출신이라,
주류 민족으로 살아온 과정에서, 소수 민족의 또 다른 생각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든다고 했다.’
- 안민영 선생님 페이스 북 글
[역사교사로서 참으로 존경하는] 안민영 선생님께서 남긴 이 글은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대한 수업을 준비하고, 고민하면서 가장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 왔던 글입니다. 우리가 나와 다른 역사의 경로를 경험해 왔던 타자에 대한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4월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의 기억입니다. 아시아 민주화 운동의 공통성과 광주민주화 운동과의 연결성을 이야기하며, 가슴 한 곳에 불투명하고, 해갈할 수 없는 묵직한 덩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함께 나눈 모두의 심중에 비슷한 것이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때의 서걱서걱한 대화의 실체는 바로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되짚어 보면 그때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미얀마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무지함을 마주하는 태도였습니다. 역사교사는 타자의 역사에 무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거대한 인류의 기록을 망라하여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때론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타자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태도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낯선 얼굴을 마주할 때, 나에게 부여되고, 나에 의해 이해되며 나의 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나에게 환원시키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였지 않을까 반문해 보았습니다. 타자의 철학을 정초했던 레비나스는 타자성의 핵심인 타인의 얼굴은 환원되지 않은 차이이며, 나에게 귀속된 모든 것과 다른 모습으로 뜻하지 않게 출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타인을 타자성 그대로 마주할 때 유대성이 발생하며, 그 유대성이 평화로운 공존의 조건이자 공동체의 윤리적 전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세계사 수업에 임하며 흔히 해왔던 공통성 찾기, 공통 담론에 귀속하기, 대서사 구성하기 등은 폭력과 차별의 기원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다르게 사유함’을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다르게 사유함은' 나와 다른 이, 내가 아닌 이, 곧 타자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다른 사유를 대안으로 들고 나온 까닭은 역사 수업에서 편하게 활용했던 ‘자기중심의 사유방식’과 ‘공통성’이 타자를 거부하는 주요 기제로 작동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수업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세계사 수업에서 경험하는 곤혹은 백화점식 망라주의에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대서사, 공통성, 담론화하기 쉬운 ‘유사성’을 지우고 나면, 모래알처럼 흩어진 망라된 지식들이 교과서에 너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 ‘왜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 물음을 머릿속에 맴돌게 하지만 뚜렷한 답을 주지 못합니다. ‘왜 가르쳐야 하는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결론은 기존의 관성으로 회귀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지난 시절 우리 역사 교육과정이 중요하다고 담보해왔던 것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은 재구성되게 마련입니다. 그 나머지는 모래알 같은 파편들로 백화점식 망라주의라 힐난 받으며 버려지거나, 무의미하게 산란될 따름일 것입니다.[가르쳐야 한다니 가르치는, 그러나 왜 알아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한 세월의 징검다리로 잊혀지는…]
세계사 교육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은 중심주의적 사유, 대서사, 환원주의적 역사 서술이 만든 해악을 극복하자는 차원이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해악이 세계를 바라보고, 삶의 태도, 특히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만들어 가는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세계사 교육에서 우리가 마주한 책임은 다양한 세계, 다원적인 시간과 공간이 만든 타자의 역사, 환원되지 않는 자율성을 지닌 다원적 삶의 양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볼 수 있는 세계시민으로서의 태도를 기를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망라주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지금의 세계사 교육과정이 실험적으로 시도되고 있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시 글의 초입 안민영 선생님의 글로 돌아와서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동시대의 역사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지켜보며 우리는 어떤 이야기들을 해야 할까요? 그리고 어떤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요? 우리는 민주화 운동이라는 역사적 ‘공통성’, 시민혁명이라는 도도한 인류사 속 대서사의 흐름, 투쟁하는 양심들이 만든 인류의 진보라는 환원성에 기반해서 이야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물론 아주 중요한 요소이며,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실존의 문제들일 것입니다. 우리와는 다른 삶의 공간, 삶의 공간이 만든 다양한 역사, 다민족 국가이며, 다원적 역사가 용융되어 있는 미얀마인 들의 삶의 총체성 속에서 터져 나오는 다층적인 목소리에 편견 없이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안민영 선생님이 말씀하신 주류 민족과 다른 소수민족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경험한 역사와 판단은 다를 수 있다는 것에 열려있는 태도는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얀마인들의 다원적이며 자율적인 역사적 경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것을 우리 중심으로 환원하지 않은 채 동시대인으로서 타자성 그대로의 유대성을 확인하고 연대할 수 있는 힘. 그것이 세계사 교육의 중심이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희 모임에서는 세계사에 대한 이러한 논의 속에서 아주 작은 실천들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타자의 역사를 낯설게 바라보는 연습, 지역별, 주제별 소서사를 만들어가는 과정, ‘같음’이 아닌 ‘다름’이 만든 공감과 소통의 가능성 찾기, 그리고 이러한 것을 수업 속에 쉬운 과정으로 녹여내는 연구들이 그것입니다. 아직은 출발선에 서있습니다. 백화점의 특별기획전을 확대해 가는 과정이라 생각하시면 쉬울 듯합니다. 백화점식 망라주의가 현실이라면, 망라된 것들을 작은 기획들로 의미 있는 관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작업, 그래서 큰 틀로 묶여지지 않는 ‘다름’ 자체가 곤혹이 아닌 다양한 소기획의 소재가 되어 즐거움을 창출하는 과정이 될 수 있게끔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물리적 한계가 따르고, 교육 현실의 총체적 문제가 압도하고 있지만 가능성을 열어가는 노력은 언제나 즐거운 듯합니다.
(3) 공감하기 [가장 필요하지만, 가장 위험한]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다.
공감은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
공감은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어서 지역이기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쪽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공감은 근시안적이어서, 단기적으로는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래에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행동을 유도한다.
- 폴 블롬 『공감의 배신』 中
세계사 교육에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다름’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기착점 중 하나는 ‘함께함’입니다.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때때로 비극이었습니다. 인류사의 대부분은 비극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되짚어 보면 함께 하기 위해 ‘다름’을 ‘같음’으로 만드는 과정이 비극의 중요한 기제였습니다. 공감은 그 과정에 충실하게 복무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폴 블롬은 그의 저서 공감의 배신에서 이와 같은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폴 블롬은 공감을 정서적 공감(sympathy)과 인지적 공감(Empathy)으로 분류합니다. 정서적 공감(sympathy)은 타인의 마음을 ‘느끼는 것’을 의미하며, 인지적 공감(Empathy)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폴 블롬은 이 중 정서적 공감(sympathy)이 만드는 선택적 공감에 대한 문제제기를 중점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정서적 공감은 자신과 비슷한 존재에게서는 즉각적으로 발동하지만, 자신과 다르다고 느끼는 존재에게서는 잘 발동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폴 블롬은 그러하기 때문에 정서적 공감이 판단 과정에서 객관성을 결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살아온 삶이 다르기에 차이는 존재합니다. 차이를 공감하는 과정에서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고, 전혀 공감하지 못한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가 사회적 쟁점으로 대두할 때 공감이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특히 공적인 결정을 해야 할 때 공감은 선택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는 것입니다. 공감하는 대상에게 보이는 호감과 열정은 공감하지 않는 대상에게는 분노하거나, 폭력적인 말과 행동으로 함께 나타날 수 있다고 폴 블롬의 설명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야기되는 차별과 혐오, 그에 따른 배제와 폭력이 역설적이게도 공감에서 발원한다는 그의 분석은 역사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세계사 교육은 ‘다름’을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다름’을 이해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공감’입니다. 하지만 ‘공감’이 배제와 폭력의 기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역사 교사에게 아주 큰 곤혹감을 안겨줍니다. 물론 역사학 개론에서도 ‘공감’과 감정이입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정서적 공감(sympathy)이 역사적 개념으로서 공감에 가깝다면 인지적 공감(Empathy)은 감정이입에 가까울 것입니다. 역사학 개론에서 많은 학자들은 공감이 지니는 객관성 결여의 문제에 대해 많은 경각심을 표출 하였고, 역사를 공부했던 역사교사들은 이에 충분한 이해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역사를 이해하는데 공감은 필요할 것입니다.
세계사 교육에서 공감은 특히나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중요성만큼이나 공감은 더 큰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공감이 가능한 ‘부분’에서 세계사 수업은 보다 수월하게 진행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감이 불가능한 ‘부분’ 혹은 반감이 압도적인 ‘공감의 배신’이 작동하는 부분에서 역사교사들은 짙은 곤혹을 마주합니다.
공감이 불가능한 부분이란 전혀 다른 세계를 의미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이 개입하지 않은 그러나 무지한 영역, 이 부분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는 아주 큰 곤혹감 중 하나일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중부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들이며, 어쩌면 누군가에겐 미얀마의 역사 또한 그와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을지 모릅니다.
더 큰 곤혹감은 외려 잘 알고 있지만, 편견과 선입견이 강하게 작용하는 지역의 역사 즉 반감이 압도적인 ‘공감의 배신’이 작동하는 역사를 다룰 때일 것입니다. 반감이 압도적인 ‘공감의 배신’이 작동하는 부분의 역사란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교실 속 혐오주의와 연동이 됩니다. 특히 우리의 역사와 깊은 관련성을 가지며 존재해왔던 국가나 민족의 역사들, 이데올로기의 편향성이 짙게 작동하여 각인된 지역의 역사들 예를 든다면 일본과 중국의 역사를 다룰 때,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와 시대를 다룰 때, 혹은 소수자의 역사를 다룰 때 작동하는 공감의 배신은 우리가 자주 마주하는 곤혹일 것입니다.
E. 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합니다. 역사교사라면 준칙처럼 여기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대화’의 통로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일 것입니다. 역사 교사는 바로 공감이 가능하도록 안내해주는 길라잡이이며, 공감이 이루어 질 때 대화의 장을 열어주는 사람이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공감’이 아주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교사는 진지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공감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 왔는지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곤혹의 지지부진을 벗어나는 또 하나의 길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선 저희 모둠에서 공감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를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되짚어 보면 주로 공통성 찾기가 공감 전략의 출발이었습니다. 그것은 보편성이라는 강렬한 믿음 속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인간이 지닌 공통의 감성, 인류 역사가 경유한 공통의 길, 다른 듯 보이나 닮아 있는 것 등을 기준으로 대화의 목록을 설정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글쓰기나 토론, 혹은 다양한 표현활동을 통해서 생각을 자극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한국의 역사와 한국역사를 이루는 서사에 익숙한 친구들에게 공통성 찾기 전략은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공감은 대화의 물고를 잘 틀 수 있는 묘약 같은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략 속에서 남긴 문제는 많은 것들이 가공되거나 세공되고 배제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의 다양성을 세공하는 일입니다.
예를 든다면 왕안석의 개혁과 당쟁에 대한 이야기를 최근에 나누었는데, 그것이 작은 정부와 큰 정부, 시장주의자들과 국가사회주의자의 쟁점으로 읽혀지고, 대화의 핵심소재가 되면서 그 시대 그 역사가 지닌 다양성과 다원성이 훼손되었다는 것입니다. 공감의 전략을 통해서 그 시대를 의미 있게 읽어낼 수는 있지만, 역사의 역사성을 훼손할 수 있는 위험이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주제로 대화의 물고를 틀 때,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공통성을 통해 공감을 형성할 수 있어 좋았던 기억이 있지만, 단일민족국가였던 우리의 경험이 다민족 국가인 미얀마의 경험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숙고하기에 오히려 공통성에 기반 한 강렬한 ‘공감’은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공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그것이 우리 모임의 또 다른 과제입니다. 특히 세계사 수업에서 ‘공감’의 역작용을 피할 수 있는 ‘공감’의 전략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까요? 우선은 선입견과 편견조차 없는 시대와 지역의 역사에 대한 ‘공감’의 전략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그것이 큰 난제이지만 첫 번째 과제가 될 듯합니다.
다음으로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공감의 배신’이 작동하는 역사, 그 시대와 민족 및 지역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입니다. 그것은 교실 속 혐오주의, 이 시대를 압도하고 있는 차별과 폭력의 문제를 역사교육을 통해 해법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기에 험난하지만 의미 있는 여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서툴고, 출발선에 서 있는 것들입니다. 세계사 교육이 안겨준 곤혹은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게 하는 역사에서 줄곧 발견되는 전환기의 곤혹과 같아 보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지지부진의 끝엔 반드시 활로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3. 언제나 미치게 아름다운
감 홍시 같은 해는 안개 낀 하늘 위 데구루루 굴러
내 차는 유리창 앞에 딱 붙어 섰는데,
그것들 너무 아름다워 내 눈이 나도 모르게 웃었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미치게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전속력 전방위적으로
아름다운 것, 왜 이렇게 아름다우냐고
물으면, 왜 어떻게 아름답다고 대답할 뿐,
-이성복의 시 「언제나 미치게 아름다운」 중 -
이성복의 시로 시작한 글이기에 이성복의 시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그 어떤 미사여구가 있다 하더라도 존재자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는 시인은 이렇게라도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노력도 그와 같지 않을까요? 동시대를 살아가며, 자신의 삶 속에서 삶의 의미를, 특히 역사교사로서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모든 아름다움에 대하여 찬사를 표합니다.
우리는 분명 가장 강렬한 곤혹과 마주해 있어 보입니다. 참으로 곤혹스런 곤혹의 지지부진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 역시 사실인 듯합니다. 하지만 그 곤혹의 끝은 아름다우리라 믿습니다. 앞으로 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해갈 할 수 없는 수 많은 문제들을 껴 앉고 시름하는 팔 할의 밤이 예상됩니다. 그러나 함께 나누고, 방법을 찾고, 소소한 변화에 감동할 수 있는 전방위적으로 아름다운 나날이 펼쳐질 것 역시 예상이 됩니다. 저희 모임에 많은 응원 부탁드리며, 2015교육과정 세계사 수업의 해법을 찾기 위한 시론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