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KTX는 빨대다: 속도가 지방을 죽인다
선거철만 되면 대한민국의 모든 지방, 시골 마을 어귀마다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현수막이 나부낀다.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후보들의 공약 1순위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우리 지역에 KTX역을 유치하겠습니다!"
"서울까지 1시간, 획기적인 교통 혁명을 이루겠습니다!"
현수막 속의 후보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고, 유세장에 모인 주민들은 박수를 보낸다. 주민들은 믿는다. 고속철도가 뚫리고 서울 가는 길이 빨라지면, 서울 사람들이 우리 지역으로 관광을 오고, 기업들이 물류비 절감을 위해 공장을 짓고, 땅값이 오르며 지역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정부 역시 '국토 균형 발전'이라는 거창한 명분 아래 수조 원의 예산을 쏟아부어 전국을 GTX와 KTX, SRT로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의 데이터는 우리의 믿음과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준다. 고속철도가 개통될 때마다 지방의 인구와 자본은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수도권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방 사람들이 그토록 염원하며 유치했던 고속철도는, 지역 경제를 살리는 수혈관이 아니라, 지역의 마지막 남은 피와 자본까지 서울로 뽑아 올리는 거대한 '초고속 빨대'였다.
KTX와 SRT 개통 이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호황을 누린 곳은 어디일까? 지방의 관광지나 특산물 시장이 아니다. 바로 서울 강남의 '빅5' 대형 병원과 신세계, 롯데, 현대백화점 본점이었다.
과거, 서울까지 가는 데 4~5시간이 걸리던 시절에는 부산이나 광주, 대구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지역 내 대학병원을 이용했고, 지역 백화점에서 옷을 샀다. 물리적 거리가 지역 경제를 보호하는 일종의 '방어막' 역할을 했던 셈이다. 하지만 고속철도는 이 방어막을 단 2시간 만에 걷어내 버렸다.
이제 부산이나 목포에서 아침 첫차 KTX를 타면 오전 10시면 서울 수서역이나 서울역에 도착한다. 삼성서울병원이나 아산병원에서 오전 진료를 받고, 오후에는 강남 신세계백화점에서 에르메스 가방이나 롤렉스 시계를 산 뒤, 저녁을 먹고 기차를 타면 밤 9시면 안방에 도착한다. 이른바 '당일치기 서울 라이프'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편리함의 대가는 가혹하다. 이것은 지역 자금의 심각한 '역외 유출'을 의미한다. 지방에서 공장을 돌리고 장사를 해서 번 돈이 지방 내에서 돌아야 지역 경제가 사는데, 고속철도가 그 돈을 실어 나르는 파이프라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 대형 병원의 대기실은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로 가득 차고, 반대로 지방 거점 국립대 병원과 지역 백화점은 파리만 날린다.
길은 뚫렸지만, 그 길은 쌍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지방의 구매력 있는 중산층과 환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러 서울로 올라가지만, 서울의 돈과 인구는 그만큼 내려오지 않는다. 이것은 명백한 '일방통행'이다.
정부는 수도권 과밀을 해소하고 지방 소멸을 막겠다며 나주(한전), 진주(LH), 김천(도로공사) 등 전국 10개 혁신도시에 공공기관을 강제로 내려보냈다. 수만 명의 직원이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정착하면, 그들이 집을 사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자생적인 도시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KTX와 SRT가 이 계산을 완벽하게 망가뜨렸다. 금요일 오후 4시가 넘어가면 혁신도시 인근 오송역, 김천구미역, 나주역 등은 서울행 기차를 타려는 공공기관 직원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마치 전쟁 피난민 행렬을 방불케 하는 '주말 대탈출(Exodus)'이 매주 반복된다.
빨라진 교통 덕분에 굳이 가족을 데리고 내려와 아이를 전학시키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아빠(혹은 엄마) 혼자 내려와 평일 4박 5일간은 관사나 원룸에서 잠만 자며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고, 금요일 저녁이면 잽싸게 서울 집으로 올라가 월급의 대부분을 소비한다.
고속철도는 이들이 지방에 진정한 의미에서 '정착(Settlement)'하는 것을 막고, 영원히 '장기 출장' 온 상태로 머물게 만들었다. 혁신도시의 식당 주인들과 택시 기사들은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 도시는 유령 도시처럼 텅 빈다"고 하소연한다. 서울과 가까워졌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서울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를 그들에게 쥐여준 것과 다름없다.
정치인들은 "전국을 2시간 생활권, 1시간 생활권으로 묶겠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린다. GTX 노선을 연장해 춘천과 천안, 아산까지 수도권 광역 교통망에 편입시키는 것을 최대 치적으로 홍보한다. 하지만 경제지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강한 경제권(서울)과 약한 경제권(지방)이 물리적 장벽 없이 빠르게 연결되면, 약한 쪽이 강한 쪽에 종속되고 흡수 통합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바로 빨대 효과(Straw Effect)의 본질이다.
천안과 아산, 춘천이 서울과 전철 및 고속철로 연결되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이 도시들은 독자적인 산업과 문화를 가진 거점 도시로 성장하기보다는,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잠만 자는 거대한 '베드타운(Bed town)' 혹은 '위성도시'로 전락해가고 있다.
지역 대학생들조차 학교 앞 원룸에 살지 않고 서울 본가에서 통학한다. 대학가는 저녁이면 썰물처럼 학생들이 빠져나가 공동화된다. 지역 기업들은 구인난에 시달린다. "서울까지 40분이면 가는데 굳이 지방 중소기업에 취직할 이유가 없다"며 청년 인재들은 더 쉽게 서울 일자리로 빠져나간다. 교통이 좋아질수록 지역의 인재 유출 가속도는 더 빨라진다.
부동산 시장도 마찬가지다. GTX가 연결된다는 소식에 천안이나 춘천의 집값이 오르는 것은, 그 지역 자체의 가치가 올라서가 아니다. '서울 접근성'이 좋아졌기 때문에 오르는 것이다. 즉, 지방 부동산의 가치조차 '서울과의 거리'로만 평가받는 '서울 식민지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지금도 지방 예산의 상당 부분은 도로를 닦고, 터널을 뚫고, 철도를 놓는 SOC(사회간접자본) 사업에 투입된다. 지자체장들에게 건물을 짓고 길을 뚫는 것만큼 눈에 띄고 생색내기 좋은 '치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콘텐츠와 소프트웨어(양질의 일자리, 교육 환경, 문화 인프라)가 텅 빈 상태에서 하드웨어(교통망)만 서울과 연결하는 것은, 지방의 붕괴 속도를 획기적으로 앞당기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작은 저수지와 거대한 바다를 지름 1미터짜리 큰 파이프로 연결하면 어떻게 될까? 바닷물이 저수지로 들어와 저수지의 수위를 높여줄까? 천만의 말씀이다. 거대한 압력 차이에 의해 저수지의 물이 바다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바닥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가 지난 20년간 수백조 원을 들여 지방 곳곳에 깔아놓은 그 수많은 고속 철로들이, 지금 지방을 말려 죽이는 가장 효율적인 빨대가 되어 지방의 심장에 꽂혀 있다. '속도'가 항상 '발전'은 아니다. 준비되지 않은 지방에게 그 속도는 종말을 향해 달리는 급행열차일 뿐이다.